김봉안
金鳳安1895. 4. 16 ~ 1959. 2.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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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5) 1895년 4월 16일 경상북도 김천군(金泉郡) 아포면(牙浦面) 송천동(松川洞, 현 김천시 송천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봉안(金奉安) 또는 김정수(金正秀)를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외시장(西門外市場) 만세 운동에 동참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남성동(南城洞) 제일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이만집(李萬集)은 이상백(李相柏)·백남채(白南埰) 등과 함께 2월 24~25일경 서울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서 경상도 만세 운동 연락 책임자이던 이갑성(李甲城)으로부터 3·1운동 계획을 접했다. 대구에서의 만세 운동 성공 여부를 타진하던 중 3월 2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3월 1일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는 독립 만세 운동의 경과를 목도한 후 마침내 대구에서 만세 시위 추진을 계획하였다. 대구의 기독교계 유지인 남성동교회 집사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 장로 겸 남산동 계성학교 교사인 김영서(金永瑞) 이외에 이상백·백남채·권의윤(權義允)·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 등과 함께 서문외시장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거행하기로 협의하였다. 주도자들은 각자 주민과 계성학교(啓聖學校, 현 계성중고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운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현 신명고등학교), 대구 성경학교 등 대구 지역에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전파하고 참여를 독려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찬동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거사 계획을 지역사회에 은밀하게 전파하면서 주변인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마침내 거사 당일이 되자 대구 시내는 아침 일찍부터 도청 정문 등 시내 각 요소마다 태극기와 격문이 살포되어 독립에 대한 의지로 충만해져 있었다. 거사 예정 시각인 오후 3시에 100여 명의 계성학교 학생과 50여 명의 신명여학교 여학생, 200여 명의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위시하여 서문외장터에 운집한 수많은 군중을 향해 이만집이 연설하고 만세를 선창하면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주도자를 비롯한 700~8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1,000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일제 경찰과 기마대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 앞 삼각지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맹렬하게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비무장의 평화적인 시위대는 6대의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대기 중이던 야만적인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면서 부득이 행진을 멈추고 주춤거리게 되었다. 이를 틈타 일제 헌병과 경찰은 시위대열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시위대를 구타하며 폭압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총 16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으나 동일한 형량을 다시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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