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갑
金尙甲미상 ~ 1919. 3.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01)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1) 출생 연도와 출생 지역은 명확하지 않지만,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 신자로서 교세를 확장하는 데 힘썼고, 1919년 단천군 파도면(波道面) 단천 읍내(端川) 邑內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천도교는 평안도·함경도·강원도 등 상대적으로 중앙정부의 감시가 미약했던 각 지방에 세를 확대하였는데, 단천에는 1902년 처음으로 유입되었다. 이후 포교사들이 각 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결과, 1919년에는 9개 면에 모두 교당을 두었다. 특히 읍내에는 신자들의 적극적인 헌금으로 대형 교당을 건설하였으며, 수천 명의 신도를 바탕으로 의복 개선 등 근대화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 및 국제연맹을 통한 국제 공조체제의 성립 등 공도(公道)에 입각한 민족 독립의 기대가 고조되자, 1919년 3월 1일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도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지방의 천도교인들도 천도교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함경도에도 서울과 강원도의 천도교 연락책을 거쳐 만세 시위 소식이 전파되었고, 단천의 경우 동년 3월 3일 비교적 일찍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염원형(廉元亨)·안성교(安聖敎)·최석곤(崔錫崑)·설운용(薛雲龍) 등은 상의한 결과 서울로 상경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하기보다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의 환원일(還元日)로 많은 신자가 교당에 모이는 3월 10일을 거사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사전 준비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전 10시경 300여 명의 신도가 단천천도교 교구실에 모여 대기도회를 가졌다. 오전 11시경 단천 교구장 염구헌(廉九憲)은 주요 신자인 최덕복(崔德福)·조동민(趙東玟)·정현필(鄭顯弼) 등을 통해 각 면의 신자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염원형 등이 항일 연설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신도 300여 명과 함께 단천읍 용현리(龍峴里) 및 하서리(下西里)의 단천시장 등을 행진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주민 600여 명이 추가로 합류하여 시위대는 단천읍내에 이르렀을 때 약 1,000여 명이 되었다. 이들과 함께 읍내를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시위 군중은 단천군청을 습격해 파괴한 후 단천헌병분대로 이동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관내 일본인들을 동원해 자경단을 결성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시위 군중과 일제 헌병 및 자경단은 주남리(州南里) 삼거리에서 대치하였다. 이때 최석곤·설운룡 등이 군중을 고무하고 서봉화(徐鳳化) 등이 헌병에 항거하다가 헌병의 총검에 사상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군중이 돌진하려 하자 헌병대가 총기를 난사하였고, 사망 8명·중상 14명 등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143명이 체포되었다. 총 3시간에 걸쳐 일어난 이와 같은 만세 시위 과정에서 선두에서 시위대를 선도하며 헌병대를 제압하려 하였다. 하지만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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