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진
金復鎭1901. 4. 3 ~ 1940. 8.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토월회
- · 파스큘라
- · 토월미술회
-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
- · 고려공산청년회
- · 조선공산당(4차)
- · 신건설
- · 창광회
- · 조선미술원
포상 정보
- · 애국장(1993)
관련 사건
- · 카프 사건
- · 제4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
- · 극단 신건설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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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3) 1901년 4월 3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남이면(南二面) 팔봉리(八峰里) 대지주(大地主)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충북 영동군(永同郡) 영동면(永同面) 괴산리(槐山里)이다. 호는 정관(井觀)이며, 김복진(金福鎭)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이 친동생이다. 1915년 3월 영동공립보통학교(永同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4월에 서울의 배재중학(培材中學)에 입학하여 5년간 수학하였다. 3·1운동에 참가한 뒤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20년에 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에 입학하여 조각을 전공하였다. 1925년 우에노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모교인 배재중학의 교사가 되었다. 이 외에도 경성여자상업학교(京城女子商業學校)와 경성공업학교(京城工業學校) 도기과와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학관 미술과에서 조각을 지도하였다. 문학과 연극계에도 참여하여 1923년 5월 도쿄에서 김기진·이서구(李瑞求)·박승희(朴勝喜) 등과 함께 극단 토월회(土月會)를 조직하고 신극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에 귀국하여 계급문학 단체인 파스큘라PASKULA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8월에 토월회와는 별도로 안석주(安碩柱) 등과 함께 토월미술회(土月美術會)를 꾸려서 연구생을 두고 근대적인 조각을 지도하였다. 1924년에는 작품 「여인입상」이 도쿄의 제국미술원전람회(帝國美術院展覽會, 약칭 帝展)에 입선하였다. 1925년에는 서울의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약칭 鮮展)에서 자각상(自刻像)으로 생각되는 「3년전」과 「나체습작」으로 입선하였다. 1926년 조선미술전에서는 나체상인 「여인」으로 특선에 올랐다. 1925년 8월 24일 기존의 문학동인 단체인 염군사(焰群社)와 파스큘라를 합동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일명 카프)을 조직하고, 김기진·박영희(朴英熙)·이량(李亮)·김경태(金京泰)·최승일(崔承一)·안석주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카프는 기존의 개인적이고 산발적인 문예운동을 지양하고, 계급의식에 입각한 정치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문예 단체이다. 1926년 1월 기관지『예술운동』을 발행했는데, 표지를 장정하고 「주제강조의 현대미술」이란 글을 발표하였다. 『문예운동』과 사회주의 계통의 선전 기관지인 『대중운동』의 발행과 집필에 관여하였다. 1927년 9월 카프의 개편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카프 산하의 학생극 단체인 신건설(新建設)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16일부터 경성방송국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와 직업’이라는 시간을 마련해 새 동요 보급 운동을 시작하였고, 방정환(方定煥) 등과 함께 우리말 동화와 동요를 보급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같은 해 8월 31일 카프의 외곽 조직인 창광회(蒼光會)에 관여하여 미술계에의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김은호(金殷鎬)·김창섭(金昌燮)·임학선(林學善)·신용우(申用雨) 등과 함께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 6월에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경기도위원회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일명 ML당으로 불리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대한 일제 당국의 제3차 탄압사건 이후, 1928년 2월경 이성태(李星泰)의 권유로 일명 ‘제4차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3월 4차 조선공산당 경기도당의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제4차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겸 선전부책임 및 경기도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 즈음 고려공산청년회 학생부 책임자로서 ‘경성학생야체이카’를 조직하여 책임비서로 활동하였다. 그 내부에 학생위원회를 신설하여 서울 시내 각 사립 중등학교 및 공립 제1고등보통학교 내에 야체이카를 조직하여 학생문제·청년문제·일본의 중국 출병 반대 등에 관해 토의하고, 일제 교육제도에 반대하여 전국적인 동맹휴학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이른바 ‘제4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에 연루되어 1928년 9월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0월 1일 경기도경찰부에 인치되었다. 1930년 11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미결기간을 포함하여 6년간의 옥살이를 했고, 특사로 10여 일이 감형된 1934년 2월 21일에 출옥하였다. 투옥 중 목각불상(木刻佛像)을 만들어 형무소 직매장에서 팔기도 하였다. 출옥한 뒤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으로 일하면서 미술 비평을 쓰거나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애지사(愛智社) 창립을 주도하였으며, 『청년조선』 창간호를 발행할 때는 소련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한때 경기도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출옥 직후 극단 ‘신건설 사건’에 연루되어 한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1936년 안창호(安昌浩) 서거 때에는 제자 이국전(李國銓)으로 하여금 그의 데드 마스크Death Mask를 뜨게 했다가, 또 다시 일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후 사상운동보다는 조각계 활동에 전념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애국공채’와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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