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
姜佑錫1901. 3. 9 ~ 1965. 7. 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혈성단
- · 조선민족대동단
- · 신간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901년 3월 9일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면에서 부친 강태숙(姜泰淑)과 모친 김외순(金外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서울에 올라와 경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18년 4월 연희전문학교 수리과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연행되고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1919년 9월 경남 진주에 내려와 당시 기독교계 호주 장로파가 경영하는 사립 광림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홍수석 등 동료 교사 2명과 함께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였다. 혈성단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비밀결사로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19년 9월 조선민족대동단이 추진하는 제2회 만세 시위 투쟁 계획에 가담하였다. ‘제2회’라는 것은 3·1운동에 이어지는 투쟁이라는 의미로, 이는 대동단이 추진한 ‘제2 독립선언’을 가리킨다. 즉, 미국 주도의 국제연맹 창립 총회가 열리는 1919년 11월 15일을 기해 이강·김가진 등 대동단 수뇌부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제2의 독립을 선언하고 3·1운동과 동일한 형태의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제2회 만세 시위 추진 과정에서 박치오(朴致悟)에게 경부(京釜) 연선 방면의 만세 시위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수락, 김봉길(金鳳吉) 등 동지 11명과 함께 오재영(吳哉泳)·김두현(金斗鉉)으로부터 『독립신문』 7부, 「경고문」 5부, 경부 연선의 시위 책임을 맡긴다는 내용의 위임장과 여비 40원 등을 수령하였다. 이들과 함께 진주와 통영, 남해 지방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동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활동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19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으며, 출옥 후 내용 미상의 활동으로 다시 체포되어 1921년 1월 27일 징역 8개월 형을 받았다. 1922년 『동아일보』 하동지국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신간회 마산지회 결성에도 참여하여 1928년 1월 초 동 지회 세칙 제정위원과 서울에서 개최될 본 대회에 제출할 건의안을 작성하는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3년 이후 토건업에 종사하고 1935년에는 미국 축음기회사 엔지니어로 일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경성대학교(현 서울대학교) 재산관리처 처장을 지내고 1950년 무렵 연희대학교 함안군 농장의 관리책임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유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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