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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황

金錫璜

1894. 2. 28 ~ 1950.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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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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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봉산(鳳山)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봉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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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의용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82)

관련 사건

  • · 2
  • · 8독립선언
  •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 평안남도청 폭파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82) 1894년 2월 28일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동선면(洞仙面) 선영리(仙嶺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이명은 김윤황(金潤璜)이다. 가세는 어렵지 않고 풍족한 편이었고, 어려서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7년 매일신보 사리원분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유학하러 일본 도쿄(東京)으로 건너갔다. 와세다(早稻田)대학 예비과정에 들어가 법과 입학을 준비하다가 재일 한국 유학생들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추진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과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방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한 사실이 한국 유학생의 혁명의지를 각성시켰다. 재일 한국 유학생들은 1918년 말부터 ‘재일조선인유학생학우회’라는 친목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였다. 유학생 대표들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운동에 나서기로 계획한 것이다. 최팔용(崔八鏞)·김도연(金度演)·김상덕(金尙德)·최근우(崔謹愚) 등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국내에 송계백(宋繼白), 중국 상하이(上海)에 이광수(李光洙)를 파견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알렸다. 1919년 2월 8일 재일 한국 유학생들은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 대회를 열고 만세시위를 시도하였다. 바로 2.8독립선언을 결행한 것이다.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최팔용·송계백·이광수 등이 와세다대학에 재학 중이었기에 2.8독립선언 계획을 힘써 도운 것이다. 재일 유학생들과 서로 연락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2.8독립선언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날 일제경찰에 체포되었지만 다행히 훈방되자 곧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소식을 전한 뒤, 부친으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3.1운동 중 상하이에 도착한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동녕 등 독립운동 지도자를 도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앞장선 것이다. 같은 해 5월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청년단(일명 상해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상해청년단의 단장은 여운형(呂運亨), 부단장은 유경환(柳璟煥), 평의원은 연충렬·선우혁(鮮于赫) 등이었는데, 서무부장을 맡았다. 안창호(安昌浩)가 미주에서 상하이로 와 6월 28일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하자 열성으로 도왔다. 이즈음 파리강화회의가 6월 말로 끝나면서 국제연맹의 창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에 제출할 임시정부의 역사자료가 필요했다. 국제연맹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 받기 위해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한일관계사를 정리하여 제출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임시정부 산하에 임시사료편찬회가 만들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안창호가 임시사료편찬회 설치를 주도하자 여기에 적극 동참하였다. 임시사료편찬회의 총재는 안창호, 실무는 이광수, 간사는 김홍서(金弘敍), 위원으로는 김병조(金秉祚)·이원익(李元益) 등 8인이었는데, 김명제 등 22인과 함께 조역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열릴 국제연맹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역사자료집 『한일관계사료집』을 서둘러 편찬하였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내외 동포들에게 정부의 소식을 전하고 독립운동 상황을 널리 알릴 필요성이 높아졌다.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독립신문의 발행이 추진된 것이다. 미주에서 1905년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공립신보』를 발간한 경험이 있는 안창호가 독립신문 발간 사업을 맡았다. 안창호의 발의로 8월 21일 『독립(獨立)』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는데, 이때 소지하고 있던 600원의 자금을 독립신문 발간 사업에 보탰다. 특히 황해도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창호가 앞장서 진행한 임시정부의 통합 운동에도 동참하였고, 제5과 교통분과 상임위원회에 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임시정부는 1920년 새해 벽두에 ‘신년은 독립전쟁의 해’로 시정방침을 정한 뒤 군사활동에 힘써 나갔다. 국내외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파리강화외의를 무대로 추진한 독립 외교활동은 큰 성과 없이 끝났지만, 3.1운동으로 민족의식과 독립의지가 고양되어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지역에 독립군 단체들이 속출한 까닭이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국내 진공작선을 결행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도 이 같은 정세변화에 맞춰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삼아 군무부의 만주 이동을 논의하고,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의 독립군단과 연계하여 독립전쟁을 영도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의 군사활동을 위해 임시정부 산하에 대한민국의용단(大韓民國 義勇團, 일명 의용단)과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 등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이들 임시정부의 군사조직은 국내로 잠입하여 각지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와 만주 독립군단의 국내지부와 연계하여 무장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가운데 의용단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당시 황해도 대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안창호와 손정도 등과 상의하여 1920년 1월 상하이에서 의용단을 결성하였다. 의용단의 조직은 단장과 부단장을 중심으로 총무, 서무부·군무부·장재부·서기로 구성되었다. 단장에는 손정도가 선임되었고, 총무를 맡아 일상 업무를 관장하였다. 본부는 상하이에 두고 국내 각지에 지단과 분단 설치를 추진하였는데, 이 임무를 주관하였다. 1920년 3월경 상하이에서 안둥(安東, 현 단둥)과 펑톈(奉天, 현 선양)을 거쳐 국내로 잠입하여 의용단 국내 지단과 분단을 결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환자를 가장하여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한 뒤 병실을 찾는 친지들을 모아 동지를 규합하고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지단과 분단을 조직하며 군자금을 모았다. 우선 평안도와 황해도 각지에 지단과 분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상경하여 서울 숭인동에서 황중극(黃中極)을 만나 경기도 지단을 조직하였다. 평안남도지단장 홍석운(洪錫雲), 경기도지단장 황중극, 중화지단장은 여행렬(呂行烈), 강동지단장 이영수, 덕천지단장 김의창(金義昌), 성천지단장 한준항, 순천지단장 노기순, 평원지단장 최윤팔, 삼등지단장 백인덕, 황해도 수안지단장 허성섭 등을 포섭한 것이다. 나아가 군자금을 모집한 뒤 안둥에서 이륭양행 소속의 선박 호남환을 타고 같은 해 7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군사활동에 필요한 각종 무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하이에서 권총과 탄환, 폭탄 등 다량의 무기를 사가지고 7월 말경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구입한 무기는 각 지단과 분단에 보내졌고, 군사활동에 사용되었다. 의용단의 군사활동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평안남도 청사 폭파와 경무부장 처단 의거를 주도한 것이다. 평안남도 청사 폭파 의거는 1920년 8월 3일 새로 신축된 제3부(경무부) 청사에 투탄한 것이다. 하지만 의용단원이 던진 폭탄이 불발하였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추격하던 일제 경찰을 칠성문 근처에서 사살하는데 그쳤다. 평안남도 경무부장 처단 의거는 의용단원 표영준 등에 의해 결행되었다. 8월 7일 평양 시내에서 나가노(中野) 경무부장이 탄 승용차에 표영준 등이 총격을 가한 것이다. 이 또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운전사만 부상시키는데 그치고 말았다. 일제경찰의 추격을 따돌린 표영준은 최승환으로 이름을 바꿔 기홀병원에 입원한 뒤 재차 거사를 도모하였다. 그러다가 표영준은 8월 22일 정보를 탐지한 평양경찰서 경찰대에 붙잡혔고, 뒤 이어 6,70여 명의 관련자가 체포됨에 따라 의용단 국내 조직도 붕괴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중국 펑톈으로 건너가 동지인 김명재(金明哉)와 김정재 두 형제가 운영하는 동인여관에 몸을 숨겼다. 이어 펑톈에서 약 20리 떨어진 탑만(塔灣)이라는 곳으로 옮겨 은신 중이었는데, 9월 16일 새벽 일본 경찰대의 습격을 받았다. 평양경찰서 아베(阿部) 경부와 나카무라(中村) 형사의 지휘 아래 영사관 일본인 순사 7명과 조선인 순사 등 모두 14명으로 편성된 일본 경찰대는 마을을 봉쇄하고, 가가호호 수색을 벌였다. 일본 경찰대의 포위망이 좁혀 오자 이들에 맞서 격렬한 총격전을 전개하여 나카무라 형사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분전했지만,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동지인 김명재와 함께 9월 21일 펑톈에서 평양으로 압송되어 의용단 사건의 주모자로 재판을 받았다. 표영준 등 2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재판에 넘겨져 1920년 12월 17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12월 22일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5년 11월 10일 가출옥하였다. 옥중에서 풀려난 뒤 서울 운니동 집에서 요양하다가 고향인 황해도 봉산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머물던 중 봉산군 동선면에 세워진 창덕(彰德)학교가 1926년 6월 운영난에 빠지자 김상황·김신황 등 친척들과 함께 교비를 지원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서선농업조합(西鮮農業組合)의 발기회를 조직하고 발기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1928년 5월 13일 서선농업조합이 창립되자 감사역으로 선임되었다. 1920년대 후반 일제의 제2차 산미증식계획에 의한 농업수탈로 피폐화된 농촌경제를 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광복 직후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에게 서신을 보내 임시정부 봉대를 서약하고 앞장서 환국 환영회를 준비하였다. 김승학(金承學)·유석현·김태원·연병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환영준비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요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안창진 등 50여 명의 청년들을 모아 대한국의용단(大韓國義勇團)을 결성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를 봉대하고 김구(金九) 주석을 추종하며 자주독립 민주국가 건설운동에 매진하였다. 한국독립당 중앙위원과 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 대한국의용단장으로 반탁운동에 앞장서고, 외세를 배격하며 임시정부 중심의 자주 독립국가 건설에 힘쓴 것이다. 1947년 12월 2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배후 주모자로 1948년 1월 16일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1948년 4월 1일 미군정 군사위원회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뒤 4월 21일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대전형무소에서 투옥되었다가 1950년 6월 30일 6.25전쟁의 와중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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