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권오설

權五卨

1897. 11. 25 ~ 1930. 4. 17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권오설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안동(安東)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조선공산당

포상 정보

  • · 독립장(2005)

관련 사건

  • · 6.10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05) 189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서면(豊西面) 가곡리(佳谷里)에서 권술조(權述朝)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아호는 오서(五敍)이며, 권일(權一)·권부덕(權富德)·권형신(權亨信) 등 이명을 사용하였다. 가일이라 불리는 가곡리는 15세기 초 권항(權恒)이 입향한 이래 반촌의 전통을 이어가는 권씨의 집성촌이다. 권항의 손자인 15대조 화산(花山) 권주(權柱)는 1480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문명을 날렸으며, 9대조 병곡(屛谷) 권구(權榘)는 이현일의 문인이며 18세기 안동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7대조 이래 가세가 빈한해지면서, 태어날 무렵에는 논 2마지기, 밭 1마지기 정도의 빈농으로 영락한 처지였다. 서당 훈장인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10세 무렵인 1907년 남명학교에 다녔으며 1908년 남명학교가 하회의 동화(東華) 학교로 합해지면서 1912년 동화 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다가, 재주를 아깝게 여긴 최준(崔埈)의 후원으로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대구 생활이 오래 가지 못한 채 1년여 만에 서울로 올라가 중앙학교와 경성부기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경제문제로 학교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1918년 10월 전라남도 도청의 고용원으로 근무하였으며, 그곳에서 3·1운동을 맞이했는데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19년 말 출옥 후 고향에 돌아와 1920년 풍서 가곡동에 원흥학술강습회를 창설하고,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학업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때 학비를 변통하지 못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나누어주고, 학용품을 대주는 등 열성적으로 학술강습회를 이끌어 주위에서 신망이 높았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였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이 사회 교육으로 뻗어나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못다 한 학업을 두 동생 오기·오직이 이뤄주기를 바라고 고학의 길이었지만, 일본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원흥학교 교장을 맡아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는 한편 인근 지역으로 범위를 넓혀 일직서숙(一直書塾)·오릉의숙(五陵義塾) 등을 창설하였고, 예천 은풍, 안동 임동·금계 등지에 강습소를 설치하며 교육 활동을 펴나갔다. 1922년 8월에는 안동 지역 30여 개 학술강습소, 개량 사숙의 통합을 위한 안동강습회연합협의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학술강습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1920년 초기부터 안동청년회·일직금주회 등 청년운동과 사회 계몽에도 힘을 쏟았다. 사회 일반의 풍기를 개선할 목적으로 1920년 9월 4일 일직금주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아 사회계몽에 앞장섰다. 1920년 가곡(佳谷)농민조합을 조직하는 한편 이준태와 함께 동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설립을 주도했다. 이로써 안동의 지역운동이 중앙과 연결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23년 11월에는 무산자동맹회의 이준태·김남수 등과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풍산소작인회 창립총회는 풍산학술강습소에서 소작인 2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풍산소작인회는 급속히 조직이 확대되면서 회원이 5,0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풍산소작인회 조직은 의결기관인 총회와 집행기관인 집행위원회로 체제를 갖추었으며, 각 면 단위에 출장소를 설치하는 등 견고한 조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풍산소작인회의 조직 기반은 1924년 4월 풍산소작인회 대표로 서울로 올라와 일약 조선노농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앙 무대로 진출해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면서도, 안동 지역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에 관심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방 출장 때마다 고향에 들러 안동 지역 대중운동에 새 바람을 일으켰으니, 안동청년회의 신흥청년회로의 전환과 화성회의 결성이 그것이었다. 1924년 9월 풍산청년회는 임시총회를 통해 신흥청년회로 명칭을 개칭하고, 새로운 취지의 선언·강령을 채택하였다. 이때 밝힌 취지는 “대세의 추이와 환경의 바뀜을 따라 청년운동의 근본정신을 관철키 위해 운동의 새 국면을 열고자 함” 이었고, 강령은 “본회는 사회 진화의 법칙에 의해 사회 혁신과 역군 훈련과 양성을 기함, 본회는 무산계급청년의 단결을 기함” 등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로 전환하였다. 풍산청년회의 성격 전환은 곧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어, 1924년 12월 예안, 1925년 1월 안동, 2월 와룡 등 1925년 말까지 안동에 있는 기존 청년회 대부분이 그 성격을 바꾸어나갔다. 1925년 8월에는 8개의 청년회에 의해 안동청년연맹이 성립되어 청년 단체를 통일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 청년회들은 중앙의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면서 중앙의 운동 조직과 연결되어갔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일약 조선노농총동맹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노농총동맹은 가입 단체가 260여 개, 회원 5만 3,000여 명으로 전국적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인쇄직공조합과 철공조합 등 각 방면 노동조합 결성에 앞면서 노농운동의 지도자로 역량을 발휘하였다. 7월 13일 시천교당에서 인쇄직공 150명이 참가한 가운데 인쇄직공조합을 창립하고, 철공소직공을 규합해 서울철공조합을 조직, 1925년 3월 박래원을 통해 경성인쇄직공조합과 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 등을 조직하였다. 1923년 9월 도쿄대지진 이후 노동 문제가 사회 문제로 전화되는 상황에서, 노농총동맹과 청년총동맹은 1924년 5월 말경 이 문제에 대한 강연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두 단체는 이 기회에 전국적인 사회 여론을 불러 일으켜 일제 탄압을 규탄·투쟁할 것을 계획하고 언론계를 비롯한 변호사회, 사상 단체 등과 공동으로 일대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6월 7일 언론기관을 포함해 31개 단체의 대표 100여 명이 수표정 조선교육협회에 모여 ‘언론집회압박탄핵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언론집회압박탄핵회의 기초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화요회의 김찬·조봉암 등과 함께 혁청단에 가입해 1924년 11월 이후 혁청단을 화요회 계열의 사상 단체로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풍산소작인회 대표로 상경한지 불과 1년 남짓만에 노농운동계뿐 아니라 사회·청년학생운동계에서도 지도적 위치를 굳혔다. 표면으로 조선노농총동맹을 이끌면서 내면에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결성 과정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1925년 2월 김재봉의 하숙에서 김찬· 김재봉· 조봉암·박헌영·김단야 등과 조선공산당의 창당 결의 모임에 참석하였고, 동년 4월 창설된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부를 맡았다. 1차 고려공산청년회 시기 주로 청년·학생들의 규합에 노력하였으며, 회원들의 모스크바공산대학 유학에 적극 힘을 쏟았다. 1925년 11월 22일 1차 조선공산당의 주요 간부가 대거 체포되는 상황에서 박헌영에 이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해외로 망명한 김찬·김단야 등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이준태와 함께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이 민족통일전선체로서 만주에 국민당을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할 때 적임자로 선임되어 국외 망명을 계획한 일도 있었는데 서울파, 북풍회 등과 협상이 결렬되면서 이뤄지지 못하였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상하이의 임시상해부와 연결되어 메이데이 기념 시위를 추진하였다. 조선공산당의 대중적 시위 계획은 1차 당 발각 후 김찬· 김단야 등이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상해부를 세운 직후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대중적 시위 운동을 계획해 갔으며,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일을 기해 대중 시위를 벌이고자 하였다. 이때 목표한 대중 시위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 등의 대중 단체를 근간으로 한 대대적인 연합 투쟁으로, 민족통일전선을 이루는 실천적 단계의 전술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융희황제(순종)가 승하하면서 상황은 급전되었다. 일제의 경계와 탄압이 가중되는 것과 함께 민심의 방향도 철시(輟市)와 봉도(奉悼) 이어지며 애도 분위기로 휩싸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메이데이 기념 시위를 철회하고, 융희황제 인산 일에 대중적 시위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운동 방침을 수정하였으니, 6·10만세운동 계획이 그것이었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4월 말경부터 계획되었다. 이때 만세 운동 계획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인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통해 추진되었다. 당시 이들은 국장(國葬)을 사회주의 운동 선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포착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민족운동의 선봉에 서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1926년 5월 1일 상주의 복색으로 변장한 뒤 국경을 넘어 안동현 역전 초원에서 김단야와 만나 계획을 밀의하고 돌아와 만세 운동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준태를 통해 1926년 5월 2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찬동을 얻어낼 수 있었다. 조선공산당은 당의 피해와 충격을 줄이기 위해 투쟁지도부를 당중앙과 분리된 형식을 취하기로 하엿다. 그것은 만세 운동으로 인해 조선공산당 조직이 궤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측면도 있지만, 책임자인 권오설이 대중 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의 중진이고, 학생운동계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10만세운동은 투쟁지도부인 ‘6·10투쟁특별위원회’가 당과 별도로 그 책임을 맡았다. 이들은 대중 시위를 3·1운동 때와 같이 전 민족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 민족주의, 종교계, 청년계, 학생계의 혁명적 인사들을 망라한 통일전선체로서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조직’을 구상하였다. 즉 6·10만세운동의 중심체로서 대한독립당을 내걸었다. 이를 위해 조선공산당에서는 당시 사회주의 진영에서 양대 세력을 이루는 서울파와 천도교 진영 및 조선노농총동맹 등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서울파가 반대해 통일전선의 형성에 차질을 빚게 되었으나, 천도교 진영의 구파와 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학생계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6·10만세운동 주체들은 격문의 지방 배포와 지방조직과의 연락을 위해 두가지 방책을 세워놓고 있었다. 격문은 지방의 『조선일보』 지사, 『개벽』지사, 소비자조합, 천도교 교구, 기타 청년단체 등 전국 각처에 발송하기로 정하였다. 격문의 송달 방법은 『개벽』, 『신민』, 『신여성』 등의 잡지에 넣어 보낼 계획이었다. 또한, 전국 각처에서 만세 운동을 추동하기 위해 책임자를 각지로 파견하고, 서울 시가지에는 6월 8일 밤을 기해 배포할 계획이었다. 6·10만세운동에 사용할 격고문을 비롯해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본위”, “산업은 조선인본위” 등의 전단을 직접 작성하였는데, 대표적인 격고문에서는 6·10만세운동의 원류를 3·1운동에서 찾고 있으며, 한국의 독립을 정의와 평화의 실현으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 “조선 독립 만세”의 구호를 통해 절대 독립을 최고의 이념과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즉, 격고문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해 완전 독립 달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3·1운동 당시 독립 선언에서는 대체로 세계 개조의 분위기에서 인도주의, 민족자결론, 고유주권설 등에 따라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정치적 침략뿐 아니라 경제적 침략의 관점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지적하는 격고문의 논리는 사회주의 수용과 더불어 성숙해진 민족 이론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격고문의 명의가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이라는 점에서도 민족 혁명이 강조되고 있었다. 통일전선체인 대한독립당은 계획의 사전 발각으로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하였지만, 민족적 관점과 계급적 관점이 민족 혁명을 위해 결합한 이념과 노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6·10만세운동은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학생층 등 다양한 주체가 서로 다른 정치 이념을 초월해 깊은 연대 아래 계획·추진되었던 점에서 3·1운동 이후 통일전선운동으로 나아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었다. 만세 운동의 준비도 각 방면에서 6월 초까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6월 초까지 상하이에서 보내주기로 한 자금이 지연되면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6월 4일 격문이 우연히 일제에 노출되면서 격문을 보관하던 개벽사가 급습당하고 천도교 관계자들이 체포되었다. 6월 7일 서울 장사동 집에서 체포되었지만, 일제 검거망을 피한 학생들에 의해 거사 당일인 6월 10일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거행되었다. 경찰에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다가 출옥을 얼마 앞둔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