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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석

權泰錫

1895. 8. 18 ~ 1948.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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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권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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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永同)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영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조선민족대동단
  • · 고려공산동맹
  • · 조선공산당(춘경원당)
  • · 조선민흥회
  • · 신간회
  •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 신한민족당
  • · 한국독립당

포상 정보

  • · 애국장(2006)

관련 사건

  • · 낙양관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6) 1895년 8월 18일 충청북도 영동(永同)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권중은(權重殷)의 차남이다. 임진왜란 공신인 충장공(忠莊公) 도원수 권율(權慄)의 11대손으로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고 애국심이 투철하며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도 컸다. 중학 과정 3년을 다녔으며, 독학으로 외국어와 경제학 등을 공부하여 사회과학에 상당한 조예를 가졌다. 1919년 4월경 복벽주의(復辟主義) 지향의 독립운동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에 참여하여 자금 조달과 각종 문건의 인쇄 및 배포를 담당하였다. 대동단 참여는 전협(全協)과 함께 대동단의 양대 기둥인 최익환(崔益煥)과의 인연을 통해 이루어졌다. 최익현이 중국 하얼빈과 북만주 등을 왕래하며 은원두(隱元豆)를 중매하였는데 함께 동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전 최익환이 ‘만주 길림에 한국 독립에 관한 의용병사령부 본부가 있는데, 나는 본부와 경성과의 기맥을 통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라고 말하고 ‘길림 본부에서 대동단이란 것을 조직하였고 이곳에 지부를 만든다’라면서 가입을 권유하였다. 그의 권유로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여 재무를 담당하였다. 총재 김가진, 서무(총무) 전협, 출판 최익환·정남용, 외무 신규식 등의 진용으로 꾸며졌는데, 총재 김가진은 70세가 넘은 고령의 노인이었고 신규식도 상하이에 있었기 때문에 초기 대동단은 전협·최익환·정남용 등과 함께 단체를 주도하면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 직후 물샐 틈 없는 일제의 감시가 강화되면서 1919년 5월 23일 최익환과 이능우가 체포되었으며, 이어서 나경섭·김영철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에는 사회주의 단체인 서울청년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 8월 서울 낙양관(洛陽館)에서 열린 북성회(北星會) 순회강연단 환영연 습격에 가담하였다. 낙양관 사건은 국내 사회주의 운동 파벌 간의 대립을 배경으로, 사상 단체 북성회(北星會) 회원들이 요리점 낙양관에서 연회를 베풀 때 서울청년회 회원들이 이들을 습격한 것이다. 낙양관 사건은 초기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후 서울청년회 계열은 화요회 등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을 추진하였다. 1924년 10월에는 서울파가 조직한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고려공산동맹은 1923년 2월 20일 사회주의 운동 세력인 서울파가 창립한 전위당으로, 서울청년회는 1922년에 이미 김사국의 지도 아래 지하 전위조직으로 ‘서울콤그룹’을 결성한 바 있었다. 이들이 전조선청년당대회 개최를 한 달여 앞둔 1923년 2월 20일 전위정당으로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한 것이다. 이들은 김사국·김영만·이영·강택진 등 17명으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정학원(충청)·이운혁(함북) 등 각 도 책임자를 임명하여 이후 화요파 조선공산당과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였다. 1926년 7월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발기에 참여하여 대동단 시절의 동지였던 최익환을 비롯한 김정기·김동철·명제세·송내호·서세충·신현익·유청 등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민흥회는 1926년 7월 8일 서울청년회와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가 중심이 되어 발기한 민족협동전선 단체로, 다수의 민족주의좌파와 조선공산당 및 그 관련단체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한된 의미의 민족협동전선 단체였다. 1926년 10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안광천(安光泉)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2월에 중앙위원회 조직부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이듬해 1월부터 11월 중까지 서울 돈의동 안광천의 하숙과 그 외 여러 장소에서 수십 회에 걸쳐 비밀리에 개최된 중앙집행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 2월 조선민흥회 해체 및 신간회와의 합동 결의에 참여하여 조선민흥회가 신간회로 흡수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즉, 신간회 발기인 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된 1927년 2월 11일 김항규·명제세·송내호·김홍진 등과 조선민흥회 대표를 맡아 신간회 측 대표를 맡은 권동진·홍명희·신석우 등과 회합하여 양 단체의 합동을 성사시켰던 것이다. 이 회합에서 조선민흥회 측은 회원 전원이 무조건 신간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하였고 신간회 측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같은 달 신간회 창립대회에 참여하여 서무부장, 이후 총무간사로 선임되어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하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의 결정에 따라 신석우와 함께 인천 영사관과 인천 화교총회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었다. 이보다 앞서 재만동포옹호동맹은 위원회를 열어 중국 만주 안둥현에서 발간되는 『동변일보(東邊日報)』가 「조선에 있는 중국인의 신변에 관한 호외」를 발행하여 허위 기사를 보도함으로써 중국인의 반한 감정을 선동하였다고 간주하였다. 인천 화교 사회에 대한 재만동포옹호동맹의 특파원 파견은 이에 항의하려는 것이었다. 1927년 12월 서울의 춘경원(春景園)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춘경원당)에 출석하여 운동 방침에 관한 테제를 제출하였다. 이 대회는 1927년 12월 엠엘(ML)파 중심의 제3차 조선공산당(이른바 통일 조선공산당)에 대항하여 서울파 주도로 상해파와 연합하여 ‘서울·상해합동파 조선공산당’을 조직·결성하는 자리였다. 일제 당국을 속이기 위해 ‘권태석의 생일 축하연’을 명분으로 개최한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조선공산당 3차 당 대회’라고 명명하고, 이낙영과 이운혁을 각각 의장과 부의장으로 선출한 후 회의에 들어가 이낙영·이병의·이운혁을 전형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튿날인 22일에는 중앙간부를 인선하였는데, 책임비서에 이영, 정치부에 이영(부장)·이운혁·홍도, 조직부에 이병의(부장)·이낙영·이증림, 선전부에 한상희·박형병, 검사부에 안준·송내호 외 1인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서울·상해합동파 조선공산당은 4개월 만인 1928년 4월 신의주에서 이영 등 당원들이 검거되면서 와해되었다. 1928년 1월에는 『조선일보』에 「조선 사회운동 개관」을 집필, 게재하여 한국 사회운동이 걸어온 발자취와 향후의 전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무경부(武警部)·선전부 책임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신한민족당 창당에 관여하였다. 1946년 신한민족당 교섭위원으로서 국민당, 한국독립당과 협의하여 통합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데 관여하고 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1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를 지지할 것을 제안하여 당내 분규를 일으켰다. 5월에 반탁을 주장하던 김구·조소앙 그룹에 의해 한국독립당에서 제명되었다. 그 후 민주한독당 창당에 관여하고 간부가 되었다. 1948년 남북 협상에 참가하려고 위해 38선을 넘어 이북으로 가던 도중 황해도 해주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유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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