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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평근

權平根

1900. 1. 26 ~ 1945.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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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권평근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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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강화(江華)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강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메이데이 기념투쟁
  • · 격문 사건
  • · 인천 방향전환 사건
  • · 만보산 사건
  • · 미군의 인천 상륙과 발포 사건(1946.9.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5) 1900년 1월 26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양도면(良道面) 능내리(陵內里)에서 태어났다.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에는 1902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1908년 강화의 합일공립학교(合一公立學校)에 입학하여 1914년에 졸업하였다. 1915년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으나 1년 6개월 만에 중퇴하였다. 1919년 강화에서 3·1운동에 참여한 후 3년 동안 충청도 등지를 돌면서 도피 생활을 하였다. 1921년 5월 14일 강화의 엡윗청년회가 주최한 청년단연합웅변회(靑年團聯合雄辯會)에서 조산(造山) 엡윗청년회 대표로 「우리의 희망을 세우라」하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이후 인천에서 노동하며 생활하였다. 1924년 5월 21일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에서 간통죄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1925년 1월 21일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1926년 11월 중국 광둥(廣東)의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하였으며, 1927년 8월경부터 상하이(上海) 등지를 돌아다니며 활동하였다. 이후 인천으로 돌아와 1928년경부터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의 기선 회녕환(會寧丸)의 선원이 되어 화부(火夫)로 일하였다. 이때부터 이승엽(李承燁)의 지도 아래 본격적으로 인천 지역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30년 1월 1일 인천 금곡리(金谷里) 복영루(復永樓)에서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인천노동조합 제2회 정기대회에서 조직선전부(組織宣傳部) 위원에 선임되면서 인천 지역 노동조합운동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같은 해 2월 28일 이승엽의 지도로 이홍순(李弘淳)·안문식(安文植)·김점권(金点權)·이두옥(李斗玉)·이수봉(李壽奉) 등과 함께 「3·1운동 11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전 조선 민족에게 격(檄)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 시위를 준비하던 중 일제 당국에 의해 ‘예비 검속’ 되어 옥고를 겪었다. 이 일로 인해 조선우선회사의 기관장 호리구치(堀口)로부터 ‘위험 인물’이라 하여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함께 일하던 조선인 선원 7~8명이 해사국(海事局)에 진정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이들 모두가 해고의 위협에 시달렸다. 1930년대에 인천청년동맹(仁川靑年同盟) 간부로도 활동하였으며, 신간회(新幹會) 인천지회에도 참여하였다. 1930년 9월 22일 개최된 인천청년동맹 확대위원회에서 ‘재만동포(在滿同胞) 문제’에 대한 항의서 발송 및 조사원 파견에 대해 배석한 경찰이 금지한 데 항의하다 구금되었고, 다음 날 풀려났다. 1931년 2월 10일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에서 개최된 신간회 인천지회 정기대회에서 지회 해소(解消)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같은 해 3월 인천의 가토정미소(加藤精米所) 하조부(荷造部) 동맹파업에 관여했다가 한때 인천경찰서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1931년 4월 10일경 이승엽, 이홍순과 만난 자리에서 이승엽의 지시로 인천노동조합의 지도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후 4월 18~20일 사이에 몇 차례 이승엽·이홍순·김성규(金聖奎)·이수봉(李壽奉) 등과 만난 자리에서 “대중에게 격문을 살포하며 시위운동을 일으켜 계급의식의 배양에 힘쓰고 노동자는 공장별로 공장반(工場班)을 만들어 이를 통일한 산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그 상부 기관으로 하고 차츰 지방연맹·도연맹을 만들어 현재의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이 이를 통할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합의되자, 이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4월 25일 이홍순과 만나 다가올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하여 노동조합원, 학생 등이 참여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준비하였다. 4월 26일에는 이창식(李昌植)과 만나 직접 붉은색과 흰색의 큰 깃발 2개를 만들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자, 메이데이를 사수하자,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 민족 독립 만세, 5월 1일을 조선독립 기념일로 하자” 등의 슬로건 10여 항을 적은 격문을 기안하여 이창식이 인쇄한 후 메이데이 전날인 4월 30일 밤에 함께 인천 시내 여러 곳에 배포하였다. 메이데이 당일에는 직접 리키다케정미소(力武精米所, 고려정미소의 전신) 직공 김호남(金好男) 등 20여 명을 인솔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5월 16일경 이창식과 만나 6·10만세운동 기념 투쟁을 계획하였다. 6월 10일을 ‘제2의 조선 독립 및 공산 운동 기념일’로 제정할 수 있도록 직접 격문을 기안하고 이창식이 인쇄하여 배포하기로 하였다. 5월 19~20일 사이에 「6·10기념일에 즈음하여 조선 민족에게 격함」이라는 제목 아래 ‘조선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일제로부터 빼앗긴 자유와 주권을 획득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라는 취지의 격문을 만들어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계획하는 등의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 7월 초 만주에서 조선 민족이 참화를 겪은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일어나자, 이창식과 함께 신간회 인천지회·인천청년동맹·인천노동조합 합동의 시국 연설회 개최를 준비하였다. 특히 연설회서 청중에게 이 사건에 일본의 책임이 크다는 사건의 본질을 인식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연설회가 개최된 7월 5일 당일에는 ‘조선 독립 만세’를 선창하여 청중과 함께 항일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인해 일본 경찰에 붙잡혀서 취조를 받고, 9월 3일 예심(豫審)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10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통산 30일) 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이른바 ‘은사(恩赦)’로 징역 2년 7월 27일로 감형(減刑)되어, 1934년 6월 12일 풀려났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인천노동조합 중앙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 8일 인천에 미군(美軍)이 진주하던 날 환영 행사에 참여하였다가 일본인 경관대(警官隊)가 발포한 총에 가슴과 배를 맞고 즉사하였다. 당시 보안대원(保安隊員) 이석우(李錫雨)도 즉사하였는데, 미군정(美軍政) 당국은 이들에 대한 일본 경찰의 발포와 관련하여 “경찰이 제시한 라인을 넘은 인천인들에 대해 총격을 가한 것은 정당하였다”라며 면죄부를 주었다. 같은 해 9월 10일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인천지부 주관 아래 인영극장(仁映劇場)에서 인천 시민장(府民葬)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주안동(朱安洞)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46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행사에서 인천시 인민위원회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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