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허
高而虛1902. 9. 5 ~ 1937. 2.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정의부
- · 국민부
- · 조선혁명당
- · 조선혁명군
- · 요녕민중자위군
- · 조선혁명군정부
- · 조선민족혁명당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만주사변
- · 신빈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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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1902년 9월 5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석담리(石潭里) 명월동(明月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최용성(崔容成)이고, 이명으로 고의부(高義府)를 사용하였다. 왜소한 체격에 안경을 착용하였고, 활달한 성격이었으며 언변이 뛰어났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부인 김명환(金明煥)은 농촌계몽운동과 여성운동에 참여하였고, 말년에는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후손은 없다. 1922년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만주(滿洲)로 이주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창춘(長春)에서 김영석(金永錫)의 소개로 지린성(吉林省) 회덕현(悔德縣) 오가자(五家子) 요하농장(遼河農場)으로 이동하였다. 요하농장에서 김진호(金鎭浩)와 변창근(邊昌根)의 권유로 농우회원(農友會員)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11월 28일 정의부(正義府) 재무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린성 성내(城內) 중국인 점포에서 방한용품 92점을 구매하여 정의부 소속 1대대에 분급하였다. 1929년 1월 정의부 중앙특파위원(中央特派委員)으로서 만주에서 활동하는 항일운동 단체들이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29년 3월 참의부(參議府) 대표 심용준(沈龍俊)·임병무(林炳武)·유광흘(劉光屹), 정의부 대표 이동림(李東林)·현익철(玄益哲)·고활신(高轄信)·최동욱(崔東旭)·이탁(李鐸), 신민부(新民府) 대표 이교원(李敎元) 등과 함께 지린에서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거쳐 4월 1일 3부를 통합하여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국민부 조직이 완비될 때까지 이동림·이교원·현익철·심용준과 함께 3부 통합을 위한 잔무 처리를 담당하였다. 1929년 5월 28일 열린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에서 교육위원장에 선임되었다. 9월 27일 열린 국민부 제2회 중앙의회에서 이성근(李成根)·장지호(張志鎬)·박재훈(朴在勳)·이진탁(李辰卓)·김돈(金敦)·임동환(林東煥)·이영희(李英熙)·안홍(安鴻)·김성장(金成璋)과 함께 외무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중앙검리국(中央檢理局) 검리도 겸임하였다. 11월에는 국민부 정치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8월 국민부에서는 중국 관헌에게 일본의 만몽침략정책(滿蒙侵略政策)에 대한 문서를 전달하였다. 이에 일본 통화정촌 영사분관日本通化檉村領事分館에서는 중국 당국에 국민부 간부 체포를 요구하였다.1929년 9월 이탁(李沰)·현익철·최동오(崔東旿)·이일세(李一世)·김이대(金履大)·고활신·이웅(李雄)·김돈·이동산(李東山)·이동림·김탁(金鐸)·김진호(金鎭浩)·이진탁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2월에는 조직부위원장, 민중부장에 선임되었다. 1930년 3월 14일 한창국(韓昌國)·윤인선(尹仁善)·강명선(姜明善)·황세일(黃世一)·이성(李成)·황운(黃雲)·이장청(李丈靑)·이세극(李世極)·이문수(李文秀)와 함께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은 국민부 계열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3단체가 통합하여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3단체 대표자들은 랴오닝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汪淸門)에 모여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을 조직하고 강령과 규약을 제정하였으며 집행위원을 선출한 후 세단체를 해산하였다. 1930년 국민부 교양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7월에는 조선혁명당 조직부 책임에 선임되었다. 8월 8일 열린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사상적 논쟁으로 좌·우파가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 결과 국민부는 국민부 지지파와 국민부 반대파로 나뉘었다. 국민부 반대파에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와 연락하며 반국민부위원회(反國民府委員會)를 조직하자 양측의 갈등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때 현익철·양세봉(梁世奉)·김문학(金文學)·양하산(梁荷山) 등과 함께 국민부 지지 입장을 표명하고 혁명 군대로 개편할 것을 주장하였다. 1931년 9월부터 조선혁명당 선전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신빈현 하북(河北)의 서명세(徐世明) 집에서 개최된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 간부회의에서 정치부장에 선임되었다. 회의 진행 중에 일본 통화영사관 경찰이 회의 장소를 급습하여 조선혁명당 간부를 대거 체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신빈사건(新賓事件)’이라 한다. 2월 양세봉과 함께 만주사변(滿洲事變)과 신빈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은 조선혁명당을 정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 항일 무장부대와의 연대에도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2월 8일 탕취우(唐聚五)가 이끄는 중국 의용군인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에 참가하여 김학규(金學圭)·왕가훈(王家訓)·유극검(劉克儉)·조보침(趙寶忱) 등 35명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2년 3월 신빈현에서 개최된 국민부·조선혁명당 간부회의에서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위기에 부딪힌 독립운동의 타개책을 결의하는 동시에 조직 내 불순분자를 처단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전투 태세를 정비하였다. 11월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 조선혁명당 자치집행위원장·심사집행위원장·중앙선전대책임으로 활동하였다. 12월에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 연락 기관 설치를 목적으로 서원준(徐元俊)을 평북 용천군(龍川郡)에 파견하였다. 1933년 4월 25일 환런현(桓仁縣) 북전자(北甸子)에서 양세봉·박대호(朴大浩)·정응선(鄭應善)·이영걸(李永杰)·김상규(金相奎)·김백파(金白波)·김고석(金沽錫)·윤일파(尹一波)·심용준·조화선(趙化善)·김보국(金保國)·김두칠(金斗七)·김원(金員)·양하산(梁荷山)과 함께 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퉁화현(通化縣) 제5구(第5區) 강전자(江甸子)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 강옥성(姜玉成) 후임으로 조화선을 선임하였다. 1934년 11월 11일 군민대표자회의(軍民代表者會議)에서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통합하여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가 조직되었다. 조선혁명군정부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35년 1월 7일 싱징현(興京縣) 왕청문 남쪽 고려성자(高麗城子)에서 의열단원(義烈團員) 홍심원(洪深遠), 조선혁명당 남경특파원(南京特派員) 오광심(吳光心)과 함께 난징(南京)에 있는 조선혁명당 대표부에 보낼 지령문과 기타 비밀 문건을 작성하였다. 1935년 6월 하순 조선혁명당 선전부책임 유광호(柳光浩)를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총책임으로 임명하고, 7월에 서울로 파견하였다. 조선국내공작위원회는 한반도에 조선혁명당 연락 기관을 설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며 정보를 수집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조선국내공작위원회의 목표였다. 1935년 3월 하순부터 6월 하순까지 난징으로 이동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과 항일 전략을 협의하였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일제가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던 시기인 1932년 10월 국외 항일운동 진영이 통합하여 항일 역량 규합을 도모하기 위해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조선혁명당·조선의열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등이 참여하였다. 이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난징으로 옮겨 활동을 이어갔으나 각 단체 간의 연락·협의 기관이라는 조직적 제약 때문에 항일운동의 통일 기관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기초로 한 새로운 정당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창당되었다. 1935년 7월 5일 조선민족혁명당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조소앙(趙素昻)·김학규(金學奎)·진의로(陳義魯)·윤기섭(尹琦燮)·김두봉(金枓奉)·김활석(金活石)·윤세주(尹世胄)·신익희(申翼熙)·이광제(李光濟)·이규동(李奎東) 등 14명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35년 9월 중한항일동맹회(中韓抗日同盟會) 정치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중한항일동맹회는 조선혁명군 제2방면사령관 한검추(韓創秋)가 지안현(輯安縣)에서 동변도(東邊道) 남만항일군 왕봉각(王鳳閣)과 만나 논의하여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였다. 중한항일동맹회 회의에서 연설하여 중한항일동맹회 정강에 ‘조선 독립’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중국 측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정강 제2조에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동북 실지(失地)를 회복하며 조선 독립을 완성한다”라고 명기되었다. 1936년 1월 17일 조선혁명군정부 제2회 군민대표자회의에서 정치부장, 입법기관인 의사원(議事院) 부의장, 사법기관인 중앙사판소(中央司辦所) 사판에 선임되었다. 2월 10일 제1회 의사회가 개최되었고, 20일 의사회 결정이 공포되었는데 이때 정치부장과 의사원 부의장에서 사임하였다. 9월 2일 제2회 중앙행정회에 선전부장으로서 참석하여 김진방(金鎭邦)·문무경(文武卿)·윤일파·박대호와 협의하여 정치선전처를 폐지하고 선전부를 설치하였다. 1936년 12월 밀정 정만기(鄭萬基)·박수림(朴樹林)의 공작으로 관뎬현(寬甸縣) 보달원(步達遠) 서건구자(西乾溝子)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조사를 받다가 펑톈(奉天)으로 압송되었다. 1937년 2월 17일 펑톈 동릉(東陵)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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