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6. 4. 8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의군부
- · 고려혁명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9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2) 1886년 4월 8일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고부면(古阜面) 신흥리(新興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고, 이명은 고고찬(高高鑽)·고인석(高仁石)이다. 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1919년 4월 이범윤(李範允)·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김청남(金淸南)·김현규(金鉉圭) 등이 주축이 되어 옌지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 근거지를 두고 조직한 대한의군부에 가입하였다. 대한의군부의 주요 구성원은 한말 의병장과 그 부대원들이었다. 대한의군부의 조직 형태는 크게 본부와 중부로 나누어졌다. 본부의 총재는 이범윤, 총사령 김현규, 참모장 진학신, 총무부장 최우익, 군무부장 김청풍(金淸風), 외교부장 신립(申立), 통신부장 지우강(池雨江)이었으며, 중부의 사령관에는 신일헌, 서무부장 이을(李乙), 재무부장 김종헌(金鍾憲), 외교부장 김종환(金鍾煥), 통신부장 박재(朴在), 군법원장 허승완(許承完), 헌병대장 최상운(崔尙雲), 군기감독 강문주(姜文周)였다. 이때 중부 참모장을 맡았다. 중부는 의군부의 실제 대다수 병력을 보유하였으며, 전투 활동의 중심 세력이었다. 그 예하 병력은 5개 대대에 이르렀으며, 참모장이 관할하였다. 중부는 항상 본부와 유기적 연락을 취하면서 화룡·왕청·훈춘 등지에서 일제 세력 및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의군부에는 전위대를 두어 군자금 모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부분의 독립군 단체가 그러하듯 대한의군부의 재정도 역시 이주 한인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1919년 4월 이동휘·이범윤·진학신·구춘선 등과 함께 탑도구에서 군자금 문제에 대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후 대한의군부는 열악한 재정 구조를 타개하려고 군자금 모집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20년 8월 간도 노야령(老爺嶺)에서 최우익(崔友翼) 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교전하여 격퇴하였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최우익·이을(李乙)·강도천(姜道天) 등 13명이 전사하였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이후 대한의군부도 다른 무장 독립 단체와 함께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였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을 겪은 뒤 만주로 돌아와 김규식(金奎植)·최해(崔海) 등과 함께 옌지현에서 고려혁명군을 창설하였다. 1923년 고려혁명군에서 전성환(全成煥)과 조선독립군 특무대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3년 5월 병력을 재수습하여 이범석 등과 함께 명월구에서 고려혁명군을 재조직하였다. 참모장을 맡아 총사령 김규식, 부관 최해, 기마사령 이범석, 사단장 최준형(崔俊亨), 헌병대장 허승완, 경무관은 정통(鄭通)과 함께 조직을 운영해 나갔다.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상설기관으로 설치한 정무연구위원회에서 최준·최창식 등과 함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건⋮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