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고제량

高濟亮

1849. 11. 11 ~ 1907. 10. 11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고제량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전남 담양(潭陽)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담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49년 11월 11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창평면(昌平面) 수곡리(水谷里)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을 지낸 고휘진(高輝鎭)이며, 모친은 장수(長水) 황씨(黃氏)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字)는 성필(聖弼), 호(號)는 인봉(麟峯)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크게 분노하며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때마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1906년 4월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순창(淳昌)으로 이동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태인 의병에 가담하고자 족친(族親)인 고광순(高光洵)과 함께 순창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미 최익현과 그를 끝까지 따르던 문인 12명은 진위대에 체포되었으며, 의병부대는 해체된 후였다. 최익현의 태인 의병이 실패하자 고광순과 함께 장성의 기우만(奇宇萬)·백낙구(白樂九) 등을 찾아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거의(擧義) 날짜를 정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 계획이 누설되어 기우만이 의병과 내통하였다고 하여 광주경무서에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백낙구도 1906년 11월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양·순천으로 진출하였으나 다시 구례로 퇴각하고 수일 후 체포되었다. 이후 고광순과 함께 논의하여 문중 사람과 출신지인 창평 사람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12월 담양군 창평면의 저산(猪山) 분암(墳庵)에서 의병 봉기하여 고광순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고광순의 부장(副將)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문중 사람으로 좌익장 고광훈(高光薰), 선봉장 고광수(高光秀), 우익장 고광채(高光彩) 등이 가담하였는데, 모두 실전 부대의 장이었다. 그 밖에 호군(護軍) 윤영기(尹永淇), 참모장 박기덕(朴基德), 종사 신덕균(申德均)·조동규(曺東圭) 등도 참여하였다. 의병 봉기 직후 남원에서 봉기한 양한규(梁漢奎)로부터 1907년 2월 12일 남원에 집결해 연합 작전을 실시할 것을 제의받고 2월 초 남원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도착하기 전에 양한규는 남원진위대를 기습 공격하다가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 상황을 모른 채 남원으로 들어갔다가 양한규의 전사 소식을 접한 후 창평으로 회군하였다. 이후 대열을 정돈하고 병력을 증강하던 중 1907년 4월에 다시 활동을 재개하여 장성의 기삼연(奇參衍), 능주(綾州, 지금의 화순군)의 양회일(梁會一)과 연합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같은 달 25일 양회일 의병부대는 능주와 화순을 공격하여 관아를 점령하고 주사청(主事廳)·우편소(郵便所)·경무서(警務署)·일본인 상가(商家) 등을 공격하고 불태워 관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신식 소총과 탄약 등의 무기류를 노획하고 전신주를 파괴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의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다시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8월경 고광순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던 족친들과 의병부대에 가담하고자 담양으로 찾아온 신덕균 등을 중심으로 창평 제심리(齊心里)에 집결할 것을 연락하고 대규모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9월 11일 고광순을 도독(都督)으로 하는 의병부대를 출범시켰다. 이때 선봉장이 되어서 부대 편제를 정하고 천지신명께 제사 드리고 맹서(盟誓)한 다음 9월 12일 제심리에서 지리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군대해산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듯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장기 항전을 계획하였다. 이에 구례 연곡사(燕谷寺)와 지리산 문수암(文殊庵) 일대를 의병 활동의 거점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지리산 방면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참모인 신덕균이 일본인이 많기로 유명한 동복을 먼저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9월 14일 새벽 곡성군 구룡산(九龍山) 부근에서 회군(回軍)하여 동복읍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도포사 박화중(朴化中)의 총격을 신호로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 읍을 점령하고, 경무서와 일본인 상가 등을 파괴하였다. 동복읍 점령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후 다시 지리산으로 이동하여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훈련하였는데, 고광순 의병부대가 화개동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군사가 자진하여 가담하였다. 특히, 광주진위대 해산 군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부터 의병부대의 전투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도 커지자 구례 연곡사(燕谷寺)로 이동하여 그곳을 본영으로 삼고 의병부대를 재편하였다. 연곡사 일대는 동쪽으로는 화개동으로 통하여 예로부터 산포수가 수백 명이 있어 정예 병력으로 쓸 만하고, 서쪽으로는 문수동(文殊洞)이 있는데 골짜기가 깊어 천험(天險)에 해당하여 대규모 군사를 주둔시켜 군사훈련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군기(軍旗)를 세우고 기에는 ‘불원복(不遠復)’이라는 세 글자를 썼는데, 이는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라는 뜻이었다. 한편, 일본군 수비대는 지리산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의병 탄압 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지리산에서 연합 작전을 진행하던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의 근거지인 북쪽의 문수암을 충화 작전의 일환으로 소각하였다. 이 무렵 일본군 수비대는 화개동에 주둔하였다. 이에 군사를 2대로 나누어 고광수와 윤영기에게 각각 맡겨 화개동으로 진격해 들어가도록 하고, 고광순과 함께 본진이 있는 연곡사에 남아 후속 작전을 구상하였다. 그런데 일본군 수비대는 화개동을 떠나 쌍계사(雙溪寺) 방면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거짓 정보를 흘리고 영남과 호남에서 이동 가능한 일본군 수비대를 소집하여 연곡사를 포위하였다. 10월 11일 일본군 수비대가 기습하여 공격해 들어오자 고광순은 나는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기로 벌써 작정하였으니 공들은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살길을 찾아가라”라고 하여 후퇴할 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 당초에 의(義)를 위해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니 그 마지막도 의를 위해 함께 죽는 것이 직책이다. 어찌 죽는 마당에 달아나 홀로 죽음으로 모면하려 한단 말인가”라고 하며 최후까지 함께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의 공세를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고광순의 아우 고광훈에게 군인 명부를 파기하여 후환을 막으라고 최후의 지시를 하였다. 이어 고광순과 함께 일본군 수비대를 향해 마지막 공격을 하였으나 끝내 일본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부하들은 운봉(雲峰)·함양(咸陽)·순창(淳昌)·정읍(井邑) 등지로 흩어져 산발적으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심철기⋮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