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권용일

權用佾

1884. 5. 11 ~ 1971. 9. 5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권용일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충북 제천(堤川)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제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호좌의진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갈평전투
  • · 서벽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84년 5월 11일 충청북도 제천군(堤川郡) 한수면(寒水面) 덕곡리(德谷里)의 딱밭골에서 권태인(泰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제천에 대대로 살아온 안동 권씨 화천군 권감(權瑊)의 후손이나 여러 대에 걸쳐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여 궁색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11세부터 서당에서 장재윤에게 한문을 배우던 중, 1894~1895년 동학농민군 봉기와 의병이 일어나면서 공부를 마무리하지 못하였다. 18세에 마을 이장 일을 보다가 제천군 청풍(淸風)의 일본군 헌병주재소에서 할당하는 마초(馬草)의 감면을 요구하다가 질책을 받자 헌병들을 구타하고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 뒤 4년간 방랑생활을 하다가 다시 행상을 하던 중 국운이 기우는 것을 통감하고 금오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공부하였다. 이때 이강년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1907년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강원도 원주로 갔다. 그곳에서 해산에 반대하는 원주진위대 병사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하자, 이강년과 다시 만나 윤기영 등과 함께 원주진위대로부터 무기를 얻어 배향산에 비축한 뒤 제천으로 향하였다. 이때 민긍호·오경묵·정대무 등의 의병부대가 제천에 도착하여 기세를 떨치자, 스에야스(末安)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1개 소대가 뒤쫓아 왔다. 이에 이강년의 지휘에 따라 영월로 통하는 조을치까지 물러섰다가 회군하여 제천을 장악한 후 숙영하던 일본군을 역습하였다. 이때 모산을 향하여 가다가 서쪽에 매복하고, 민긍호는 남쪽에서, 윤기영은 서울고개를 따라 들어가며 일본군을 포위하여 4시간 가까이 격전을 벌여 일본군 5명 이상을 사살하였다. 제천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의병부대들이 강원 주천으로 옮겼다. 인근에서 의병을 모아 온 김상태가 이강년을 대장으로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이강년은 인물과 지위를 아울러 갖춘 이가 의병부대를 이끌어야 한다고 사양하였으나, 결국 대장에 올라 ‘호좌의진’을 재건하였다. 단발령 후 유인석을 중심으로 위세를 떨쳤던 호좌의진이 부활한 것이다. 이때 부대 편성 과정에서 우군장 이중봉 휘하의 선봉장이 되었다. 호좌의진의 첫 번째 목표는 충주성 공략이었다. 그러나 조동교 부대와 민긍호 부대가 도중에 일본군에게 가로막혀 합류하지 못하였고, 일본군의 저항이 거세었기 때문에 충주성 공략에 실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제천에 다시 들어와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었기 때문에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을 피하여 월악산 자락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문경 쪽으로 부대를 옮겼으나, 이 무렵 의병부대는 충주성 전투에서 탄환을 너무 많이 소모하였기 때문에 탄환을 보충하는 일은 부대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때 이만원과 함께 배향산에 비축해 둔 탄환을 옮겨오는 일을 자청하여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무사히 탄환을 운반하였다. 이강년은 이 공을 높이 평가하여 승진시켰다고 한다. 이후 문경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하였고, 9월 10일 벌어진 갈평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의병부대가 갈평에 들어온 일본군을 공격할 때, 갈평 동쪽 산자락에 매복하여 남쪽 산에 매복한 백남규, 북편으로 들어간 하한서, 중앙에 매복한 이만원과 함께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을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초 영월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연풍 지역에서 벌어진 우군의 작전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 무렵 의병 해산을 권유하는 선유사(宣諭使) 홍우석 일행이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쪽에 나타나자, 이들과 싸리재에서 벌인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접전하는 과정에 수십 명의 의병이 전사하였으나 초전에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말에서 11월 초에는 죽령에서 일본군 안동수비대와 격전을 치렀다. 11월 말경부터는 대구에서 북상한 일본군 수비대의 ‘토벌 작전’과 겨울 추위에 의병 부대가 시달렸다. 결국 의병 부대는 11월 26일 수발전투에서 패하고 일본군에게 쫓겨 흩어지는 위기를 겪었다. 12월 16일에는 영춘의 복상골(단양 어상천면 방북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한때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을 만큼 치명적인 패배였다. 그의 직속 상관 이중봉도 이때 체포되었다. 복상골 전투 이후, 이강년이 주력을 이끌고 북상하였으나 합류하지 못하였다. 이강년은 일부 병력을 해산 시켜 봄철에 다시 봉기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김상태·이명상·변학기 등 뒤에 남은 부장들과 함께 이강년 대장이 북상한 동안에도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08년 5월 이강년이 본진을 이끌고 남하하였을 때 영월 상동에서 이강년 본진을 맞이하였다. 이 무렵 남쪽에 남았던 의병 지도자들은 경북 봉화군 북부의 서벽에서 일본군과 맞서는 작전을 구상 중이었다. 이강년의 지도 아래 상동읍 천평리에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고, 5월 17일 대규모 접전이 벌어졌다. 의병을 공격하려고 출동한 일본군을 서벽 입구에서 맞아 포위하여 타격을 주었다. 승리의 기세를 몰아 봉화군 재산면 현동리까지 나가는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듭된 일본군의 ‘토벌’ 때문에 의병 세력은 날로 위축되었다.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 병력은 이강년 부대를 뒤쫓았고, 결국 7월 2일 청풍의 작성산 전투에서 기습을 받아 부대가 무너졌다. 이강년이 체포되자, 상경하여 재판 중이던 이강년을 시중들었다. 이후 이 지역 의병의 기세가 크게 꺾이자, 수배를 피하여 은둔하였다. 후에 전 승지 김규흥(金圭興)과 이범구(李範九)·김규철 등과 함께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보내는 고종의 편지를 가지고 출국하다가 도중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체포되자, 정경로(鄭敬老)라는 가명에 산삼 상인으로 가장하여 인천에서 소금 배를 타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중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1919년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참여하여 7년 동안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가 사이의 연락책을 맡았다고 한다. 후에 몰래 귀국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충주에 살고 있던 옛 동지 백남규와 왕래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해방 뒤에 문경에서 이강년 의병장에 대한 현창 사업을 추진할 때, 이만원 등과 함께 참여하여 자신의 경험담을 『운강선생창의일록』에 반영토록 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자신의 평생 삶을 회고하며 의병 활동을 서술한 「정미왜란창의록(丁未倭亂倡義錄) -권청은이력지(權淸隱履歷誌)」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구완회⋮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