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옥
權基玉1903. 1. 11 ~ 1988. 4.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중국 공군
- · 한국애국부인회
- · 임정 군무부 산하 공군설계위원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903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상수구리(上水口里) 에서 아버지 권돈각(權敦珏)과 어머니 장문명(張文明)의 1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13년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설립 운영한 숭현(崇賢) 소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동시에 숭의(崇義) 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19년에 졸업하였다. 숭의여학교 시절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1919년 2월 하순 숭의여학교 교사 박현숙(朴賢淑)과 정익성(鄭益成)의 지도로 기숙사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애국가를 등사하였다. 3월 1일 숭덕(崇德) 학교에서 시작되어 거리로 이어진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3주 동안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지냈다. 1919년 6월부터 7월까지 임시정부에서 온 김순일(金淳一)·김재덕(金在德)·김정직(金鼎稷)·임득삼(林得三)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독립공채를 판매하여 임시정부로 보냈다. 또 평양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김재덕으로부터 평양 근교 30리 밖 과수원에 있는 권총을 가져다달라는 부탁을 받고 동생 기복(基福)과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권총을 찾아주었다. 그해 10월 1일 일제의 시정 기념일에 숭의여학교생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3주일 구류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10월 30일~11월 4일 평양에서 항일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3주일간 고문 수사를 받고 검찰에 송치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정식 재판에 넘어가지 않은 채 여자 감옥인 영문감옥에 갇혔다. 약 6개월 감방살이 끝에 학질이 발병하여 1920년 4월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에는 종교 활동에 나섰다. 5월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를 조직하고 초청 강연을 다녔으며, 6월에는 대구·밀양·경주 등 20여 지역을 순회 전도하다가 몇 차례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1920년 7월 말경 임시정부에서 밀파된 문일민(文一民)·장덕진(張德震)을 숭현소학교 석탄 창고에 숨기고 폭탄 제조를 도왔다. 8월 3일 평남경찰부 청사에 폭탄이 투척되어 장벽 일부가 파괴되고 경찰 두 명이 폭사하였다. 그해 8월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임득산(林得山)에게 독립공채를 받아 9월 말까지 판매하였다. 10월 초순 평양 대한애국부인회 회원 106명이 붙잡힐 때 숭실학교(崇實學校) 기숙사에 숨어 지냈다. 10월 중순 임시정부 연락원 윤응렴(尹應溓)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숭현소학교 동창 최순덕(崔順德)을 비롯한 6명과 함께 평양을 탈출하였다. 진남포를 거쳐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풍천(豊川) 포구에서 2주일 기다려 멸치잡이 배를 타고 20여 일만에 산둥성(山東省) 영성현(榮城縣) 포구에 도착하였다. 11월 말경 상하이 공공 조계 손정도(孫貞道) 목사 집에 도착하였고, 1921년 2월 프랑스 조계 보강리(寶康里)에 있는 노백린(盧伯麟)·이동휘(李東輝) 등이 거주하던 집으로 옮겼다. 1921년 4월 하순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의 소개로 서양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항저우(杭州)의 홍도(弘道) 여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6월에 졸업하였다. 상하이로 돌아와 민족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3년 12월 초 한국 청년 3명과 함께 윈난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校)로 갔다. 1917년 미국인 스미스A. Smith의 곡예비행을 본 후, 비행사가 되는 일이야말로 독립운동을 펼칠 최선의 길이라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윈난성장(雲南省長)에게 보내는 중국인 혁명가 방성도(方聲濤)의 추천장, 임시정부 이시영(李始榮)의 추천서, 탕지야오(唐繼堯)의 친필 편지 등의 도움으로 윈난항공학교 입학을 허가받았다. 제1기생 38명 중에 유일한 여학생이었으며, 한국인 학생으로 이영무(李英茂)·이춘(李春)·장지일(張志日) 등도 있었다. 기초 이론과 지상 실습교육을 마친 후 훈련 비행을 하였다. 8월 한국인 학생들을 암살하려고 일본 영사관에서 보낸 밀정 3명 중 1명을 산으로 유인하여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취조한 끝에 사실을 확인하고 죽였다. 1925년 2월 28일 윈난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이영무와 함께 5개월간 견습 비행 훈련을 받고, 12월 중순까지 보조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26년 1월 의열단원 이상일(李相一)의 편지를 받고 이영무와 함께 상하이를 거쳐 국민혁명군의 근거지인 광저우(廣州)로 갔다. 광저우에서 김원봉(金元鳳) 등 의열단원들을 만나고,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교본부 부관 김철남(金鐵男), 판공실 부관 손두환(孫斗煥)을 만났다. 또한, 광동항공학교에서 훈련받고 있던 김진일(金震一)·유철선(劉鐵仙)·장성철(張聖哲)·차정신(車廷信)·이병운 등을 만났다. 2월 초순 광저우에 머물던 여운형(呂運亨)을 만나서 펑위샹(馮玉祥) 군벌의 국민군 항공대 소좌 서왈보(徐曰甫)를 소개받았다. 2월 중순 이영무와 함께 베이징(北京) 근교 난위안(南苑) 항공학교에 있던 국민군 항공대로 가서 서왈보를 만나고, 국민군 제1항공대 비행사가 되었다. 4월 20일 항공처 부비항원(副飛航員)으로 임명되고, 서왈보의 소개로 펑위샹의 막료로 활동하던 유동열(柳東說)과 이상정(李相定)을 만났다. 1926년 7월 초순 펑위샹군이 장쭤린군의 공격으로 내몽골로 밀려나자 유동열·이상정·신영삼(申榮三) 등과 함께 펑위샹군을 따라 쑤이위안성(绥远省)의 바오터우(包頭)에 머물렀다. 9월 펑위샹군이 군대를 정비하고 항공대를 해산하자 여비 20원을 받고 퇴직하였다. 10월 6일 이상정과 바오터우에서 결혼하고, 11월 베이징으로 옮겼다.1927년 1월 초순 상하이로 이동하고, 3월 24일 국민혁명군 동로군(東路軍)이 상하이에 입성하자 동로군 항공사령관 류페이첸(劉沛泉) 장군을 찾아가 비행원으로 임명받았다. 3월 말 쑨촨팡(孫停芳) 군벌의 비행기를 접수하기 위해 항공사령부 장교들과 함께 항저우로 갔다. 이상정이 류페이첸 항공사령관의 초빙을 받아 영어 통역원으로 동행하였다. 쑨촨팡 군벌의 비행기와 비행장을 접수하고, 새벽마다 곡예, 편대, 정찰, 공중전, 폭격 등 여러 가지로 비행 연습을 하였다. 4월 12일 장제스(蔣介石)가 국공합작을 파기하고 상하이에서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자, 상하이와 난징(南京) 사이의 전선을 오가며 연락 비행을 하였다. 1928년 1월 국민당 정부와 항공서가 난징으로 이동하자, 난징에서 항공서 제1대 정찰대 소속 비행원으로 복무하였다. 3월 18일 이상정, 손두환, 조념석(趙念錫), 주취천(朱翠天)과 함께 공산주의자 혐의로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집세 문제로 집주인(중국인)과 다툰 것이 원인이었다. 중국 정계 요인들의 노력으로 40여 일 만에 풀려났다. 1929년 봄 난징 시내 진회하(秦淮河)에 머물렀다. 6월 4일 중국 국민군의 직급 조정으로 2단계 하향되어 상위(대위)로 임명받았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2월 초순 항공서 제1대 소속으로 상하이에 출동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무공훈장을 받았다. 1933년 7월 항저우항공대로 발령받고 항저우 중앙항공학교의 교관을 겸직하였다. 이 해에 의열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학생 모집원과 연락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5년 초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 기획한 선전 비행에 비행사로 선발되었지만, 6월 28일 일본군이 베이징 근처 펑타이(豊台)를 기습 점령하는 바람에 선전 비행은 무산되었다. 그해 가을 난창(南昌) 공군도서관으로 전보되었다. 1936년 하반기 이상정과 함께 일본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아 체포되고, 중국 군복을 벗었다. 당시까지 비행 기록은 윈난항공학교에서 300시간을 합하여 1,300시간이나 되었다. 1937년 3월 초 8개월의 수감 생활 끝에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37년 11월 12일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자, 11월 14일 조선민족혁명당의 동지들과 함께 중국 정부가 주선해준 목선을 타고 난징을 탈출하였다. 12월 초순 한커우(漢口)에 도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식에 참석하였다. 12월 중순 윈난성에 집결한 항공학교의 통합과 운영을 도와달라는 중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 이상정과 함께 쿤밍(昆明)으로 갔다. 1938년 9월 이상정과 함께 육군참모학교 교수로 발령받아 충칭(重慶)으로 갔다. 중국군 장교들에게 영어와 일어, 일본인 식별법과 일본인의 성격 등을 가르쳤다. 또한, 정보 수집 업무도 맡아 라디오 방송을 듣고 그 내용을 적어 군사통계국에 제출하였다. 1943년 2월 23일 충칭의 독립운동의 좌우파 부인들을 단결시켜 김순애(金淳愛)·방순희(方順熙)·최선화(崔善嬅)·최애림(崔愛林)·최형록(崔亨祿) 등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사교부 주임을 맡았다. 8월 19일 손기종(孫基宗), 최용덕(崔用德)과 함께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공군설계위원회’를 발족하고 공군설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광복되자 상하이로 갔다. 1947년 8월 27일 이상정이 어머니의 사망 전보를 받고 귀국하였고, 10월 27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1948년 12월 서울에 정착한 언니 가족과 남동생 부부를 만나고 상하이로 되돌아갔다. 1949년 2월 중국국민당 정부와 함께 타이완(臺灣)으로 피난하였다가 5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임명되어 초창기 군 조직과 공군 창설에 이바지하였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연감』(韓國年鑑) 발행인을 지내고, 1966년 한중문화친선협회, 1967년 3·1여성동지회 등을 창립하였다. 또한,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재향군인회 명예회원·부인회 고문 등을 지냈다. 1971년 자유중국 정부로부터 ‘중화민국 비행흉장’과 ‘공군 일급 상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윤선자⋮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