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돈
權五敦1900. 10. 12 ~ 1928. 6. 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흥청년동맹
- · 조선학생과학연구회
- · 조선공산당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5) 1900년 10월 12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서면(豐西面) 가곡리(佳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이명은 오상(五尙)이다. 가곡리는 안동 권씨의 집성촌으로 6·10만세운동의 총책임자 권오설이 집안 형이어서 아래 윗집을 오갈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다. 아버지가 서당 훈장이고, 학문을 숭상하던 집안 분위기로 인해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13세 무렵인 1913년 인근의 사립학교인 동화학교에 다녔다. 고향에서 3·1운동을 맞이한 뒤 1920년 서울로 올라와 한성강습원 중학과를 마치고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졸업하였다. 권오설의 영향으로 중앙고보 재학 중이던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신흥청년동맹은 김찬·박일병·강달영 등 화요파 출신이 주도한 사상 단체로서, 조선노동연맹회·토요회·신사상연구회 출신들과 힘을 합해 만들었다. 강령에서 ‘사회 진화의 법칙에 의거해 신사회 건설자의 훈련 양성, 계급의식의 각성을 촉진하기 위해 체계적 무산 청년의 수양 기관 설치, 신흥 청년의 단결을 도모하고 출판·강연·연극 개최’ 등을 내세운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조직이었다. 신흥청년동맹 구성원들은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할 때 주요 간부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1924년 11월에는 화요파 인사들이 주도해 계몽 단체에서 사상 단체로 탈바꿈한 혁청단(革淸團)에도 가입하여 사회주의 청년운동을 벌여 나갔다. 혁청단은 신흥청년동맹의 자매 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다음날인 1925년 4월 18일 서울 박헌영 집에서 창립 대회를 열었다. 대회에는 10개 도(道)에서 28개 세포단체 대표 19명과 조선공산당 파견 대표 1명 등 20명이 참석하였다. 20명 대표 가운데 노동자 1명, 농민 1명, 여성 1명을 빼고는 지식계급 17명으로 모두 신흥청년동맹과 화요파에 속하는 30세 미만의 사회주의 청년이었다. 이때 권오설의 지도 아래 이병립·조두원 등과 함께 참가하였으며, 고려공산청년회는 ‘학생부’를 설치해 중등 이상의 학생을 지도·훈련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1925년 9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창립에 힘을 쏟아 집행위원·임시상무 등을 맡았다. 임시상무의 역할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사무실에서 숙직하면서 특히 지방에서 올라오는 학생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강령에서 ‘과학 연구와 과학 사상의 보급을 기함, 조선 학생의 사상 통일과 상호 단결을 도모함, 인간 본위 교육의 실현과 조선학생의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기함’ 등을 내세우며, 사회주의 사상의 연구 및 보급을 통한 식민지 사회의 모순 해결, 사상 통일에 의한 학생계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창립 당시 회원 수가 70여 명에 머물렀으나, 6·10만세운동이 일어날 무렵 500여 명으로 늘어나 규모가 가장 큰 학생운동 단체로 발전해 갔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 1학년에 입학하였다. 1926년 3월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권오설과 함께 학생부 프랙션에 배치되었다. 이들 학생부는 6·10만세운동 계획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핵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6·10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것은 1926년 4월 25일 융희황제(순종)가 승하한 지 1주일 남짓한 5월 초부터였다. 이들은 3·1운동 때와 같은 민족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에 뜻을 같이하고, 천도교·조선공산당 등과 연대해 만세 운동 준비를 추진하였다. 이때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임무와 역할은 순종 장례식 당일 가두 행렬에서 만세를 선창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사를 3일 앞두고 6월 7일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의 만세 운동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권오설이 체포되면서 학생계만 독자적으로 추진해나갔다. 애초 천도교 측에서 인쇄한 격문과 태극기를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모두 압수된 상태에서 6월 7일부터 급히 태극기와 ‘조선 독립 만세’ 깃발 등을 제작하고, 격문을 작성해 6월 9일까지 등사판으로 1만여 매를 인쇄할 수 있었다. 조선교육회관에서 함께 기숙하던 중앙고보생 이선호와 함께 평동의 김종찬의 집에서 격문과 태극기를 인쇄·제작해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하였으며, 인산 당일인 6월 10일 종로 일대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 당일에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무사히 빠져나왔으나, 7월 방학을 맞이해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 일로 연희전문학교에서 1개월 정학을 당하고, 일제 당국으로부터 기소유예를 받았다. 1926년 11월 연희전문학교에 복학하는 한편 조선공산당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은 안광천이 책임비서를 맡고 안동 출신이자 화요파 계열의 김남수가 조직부장을 맡고 있었다. 이때 조선공산당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1927년 9월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옥고를 겪던 중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28년 5월 1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끝내 고문의 여독으로 석방 20여 일 만인 6월 3일 숨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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