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찬
姜奎燦1874. 1. 1 ~ 1945. 4.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105인 사건
- · 평양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6) 1874년 1월 1일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낙춘(樂春)이며, 어려서 농건서당(農建書堂)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미국인 선교사 매큔(George S. McCune, 尹山溫)이 세운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사범부(師範部)를 졸업하였다. 이후 서울의 예수교 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04년부터 1906년까지 평북 철산군(鐵山郡) 백량면(栢梁面)에서 신식서당을 운영하였다. 1906년부터 1908년 여름까지 선천군 가물암소학교(嘉物岩小學校) 교사로 근무하였다. 1908년 가을부터 모교인 신성중학교 한문 교사로 봉직 중 ‘105인사건’ 피의자로 체포되었다. 1911년 10월 신성중학교 재임 중 영문도 모르는 채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경무총감부 산하 용산 헌병경찰서에 구금되어 6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악의에 찬 위협 하에 온몸을 곤봉으로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으로 시작한’ 취조 과정에서 ‘네놈은 신민회원이요, 기독교 신자로 우리(일본)를 가리켜 왜놈 왜놈하면서 우리말은 무엇이든지 듣지 않고 서양 놈의 말이면 죽을 곳이라도 갈 놈인 줄 안다’라고 하며 마구 구타하면서 허위 자백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반인륜적 고문과 위협으로 결국 그들이 짜놓은 사건 각본대로 허위 진술을 해야만 하였다.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105인사건은 사건 당시 ‘데라우치 총독 모살미수 사건(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이라고도 불렸는데, 105인사건 피의자 혐의 내용은 ‘신민회에 가입하여 학생·청년들을 대상으로 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간도 지역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실추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독립 전쟁을 준비하던 중 합방되자, 이에 분개하여 총독 암살 모의에 가담하였다’라는 것이었다. 1912년 6월 28일 공개재판이 개시되자, 앞서 경무총감부와 검사정(檢事廷)에서 진술한 내용은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이었다고 항의하였으나 1912년 9월 28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123명 기소자 가운데 105인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 사건을 날조한 일제 당국에 따르면 강규찬은 선천 지역 신민회 조직 반장 양준명(梁濬明) 밑에서 최덕윤(崔德潤)·홍성익(洪成益)·곽태종(郭泰鐘) 등과 함께 평의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혐의로 1심에서 이덕환(李德煥)·김동원(金東元)·양전백(梁甸伯) 등 39명의 피의자와 함께 6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05인사건 피의자로 체포되었을 당시 재산이 3만 원에 달해 다른 피의자들보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1913년 3월 20월 경성복심법원 2심 공판 때 105인사건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임치정(林蚩正)·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유동열(柳東悅) 6인을 제외한 99인이 풀려날 때 함께 석방되었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하여 목사가 된 후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초순 선우혁(鮮于爀)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지시를 받고 비밀리에 평양에 잠입하였다. 선우혁은 독립 만세 운동 준비와 군자금 조달 방법 등을 협의하기 위해 평양에 와 동지들을 만났는데 이때 당시 부흥 목사로 이름을 떨치던 길선주(吉善宙) 집에서 안세환(安世桓)·이덕환·윤원삼(尹愿三)·윤성운(尹聖運)·변인서(邊麟瑞) 등과 함께 비밀 회합을 하였다. 이들은 105인사건 때 함께 옥고를 겪은 동지들이었으며 선우혁과는 동향(同鄕)이기도 하였다. 3·1운동이 발발하기 전인 1919년 2월 27일 선우혁과 정일선(鄭一善) 등을 비롯한 앞의 동지들과 비밀 회동을 다시하고 평양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정에서 광무황제(고종) 봉도식(奉悼式)을 열고 이 행사가 끝나자, 바로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시위에 돌입하였는데 이때 독립정신과 관련된 연설을 하였다. 이 일로 평양경찰서에 구금, 서울로 압송되어 그해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 곧 독립선포식을 갖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한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20년 4월 출옥한 후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 교역자로 목회 활동을 재개하였다. 1921년 평남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12월부터는 고향 선천읍 내 동교회(東敎會)로 옮겨 시무하였고 이후에도 봉동교회(鳳洞敎會)에서 시무하였다. 1941년부터는 자신의 모 교회인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에서 말년 목회를 하던 중 1945년 4월 1일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경로⋮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