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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팔

姜基汃

1896. 9. 11 ~ 1936.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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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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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강서(江西)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강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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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종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6년 9월 11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용강면(龍岡面)에서 태어났다. 본적지는 평남 강서군 함종면(咸從面) 송동리(松洞里)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919년 3월 황해 해주의 자혜의원 부수(副手)로 근무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고향 함종으로 와서 서창림(徐昌林)·김정현(金鼎鉉)·이정연(李鼎淵)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6일 동지들과 함께 함종리 부근의 다수 주민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읍내로 향하였다. 함종면 내 시장통에 이르자 차명건(車明鍵, 24세, 구두장수), 김병선(金炳善, 31세, 농업, 구장), 김기준(金基濬, 38세, 의사), 김자지수(金子支洙, 28세, 잡화상), 고선원(高善元), 박종권(朴宗權, 69세, 농업) 등도 찬동하여 참가하였다. 이날 정오경 500여 명의 군중이 대열을 지어 함종보통학교 앞 광장에 집합하였다. 이에 일장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를 낭독·설명한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한 후 군중을 인솔하여 시위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가 행진을 시작하자 증산면 외영리 윤태빈(尹泰彬, 25세, 학생)도 마을 주민 약 10명을 거느리고 와서 참가하는 등 시위 군중은 약 2,000명으로 불어났으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미리 헌병출장소장 후쿠나가(福永) 상등병에게 시위 계획을 통고하여 무력으로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고, 시위 군중에게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일관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헌병들은 시위 행렬을 보고 무력 탄압을 하지는 않았으나, 주동자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시위대가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마치고 해산하려 할 때, 헌병들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파악해 둔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3월 8일 오후 7시 300여 명이 다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관리와 헌병의 해산 명령에도 시위를 계속하자, 진남포에서 출동한 응원대 장교 이하 15명이 출동하여 총격을 가해 현장 사망 2명, 중상 1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주모자 2명이 체포될 때,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헌병출장소로 연행되어 철야 심문을 받았다. 헌병이 머리에 오물을 퍼붓고 시계를 찼던 왼손을 구둣발로 짓밟는 바람에 깨진 시계 유리 파편이 동맥을 파열시켜 실신하기도 하였다. 고등법원까지 법정 투쟁을 계속하였으나 그해 6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25년 10월 진남포 신흥리 삼숭학교(三崇學校) 신축 기금 모금에 참여하였고, 강서군 함종청년회에게 주최하는 강연회에 「하(夏)의 위생에 취하여」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는 등 함종과 진남포 지역사회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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