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종석
郭鍾錫1846. 6. 24 ~ 1919. 8.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46년 6월 24일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단성면(丹城面) 사월리(沙月里) 초포(草浦)마을에서 아버지 곽원조(郭源兆)와 어머니 해주 정씨海州鄭氏 사이의 2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명원(鳴遠), 호는 회와(晦窩)·면우(俛宇)이고, 아명은 돌뫼·석산(石山), 아호는 유석(幼石)인데, 국권 상실 후 이름을 도(鋾), 자를 연길(淵吉)로 바꾸었다. 4대조 가운데 과거에 급제하거나 관리를 지낸 인물이 없을 정도로 집안이 한미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가정 형편 속에서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내며 6세에 사서(四書)와 시경(詩經)을 암송하고 7세에 서경(書經)을 읽었으며 8세에 여러 경전과 역사서를 익혀 마을에선 신동(神童)이 났다고 하였다. 12세 때 과거시험 준비를 그만둔 뒤에는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1870년 경북 성주(星州)의 대학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찾아 제자가 된 뒤, 심즉리(心卽理)의 종지(宗旨)를 전수하였다. 이후 화이론(華夷論)과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입장에서 서양 세력을 배척하였다. 50대에 이르러 학문적·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며 조정까지 명성이 알려졌다. 1895년 음력 1월 신기선(申箕善)의 천거로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어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로 반일 감정이 극심해지자, 그해 음력 12월 「삼계통문(三溪通文)」 발송에 참여하여 안동 지역 유림의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이 일로 제1차 안동의진(安東義陣), 일명 권세연(權世淵) 의병부대가 결성되자, 아장(亞將)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아 구설에 올랐다. 이듬해 3월 이승희(李承熙) 등과 함께 일본의 죄상을 규탄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을 지어 서양 공사관에 전달하였다. 1899년 54세의 나이에 중추원 의관(議官), 1903년 6월 비서승(秘書丞)에 잇따라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903년 10월 고종(高宗)의 명을 받고 덕수궁에 입궐하여 독대하였다. 고종은 ‘산림(山林)’으로 예우하며 파격적으로 의정부 참찬, 경연관·서연관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이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평범한 내용의 시무(時務) 4조를 올렸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에서 러시아와 연대하는 것은 호랑이를 꾀어 이리를 내쫓고 다시 호랑이의 밥이 되는 격이라고 하여 위험성을 환기하고, 청(淸)과 서양 열강에 특사를 급파해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할 것을 건의하는 차자(箚子, 상소문)를 비밀리에 올렸다. 60세가 되던 1905년 11월 을사늑약 강제 체결 소식을 듣자 상경하여 12월 중순 고종에게 독대를 요청하였으나 답을 받지 못하자 6일째 되는 날 서울을 떠났다. 낙향하면서 을사오적 참수, 을사늑약 폐기, 국제사회에 협조 호소를 골자로 한 상소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유교계의 기대가 컸던 만큼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낙향하자 신랄한 비판에 시달렸다. 이즈음 일본을 비방하는 격문을 배포하였다가 일본군 병참사령부에 구속되었는데, 이때 석방된 허위(許蔿)가 은밀히 찾아왔다. 을사늑약 체결 후 전국적으로 중기 의병으로 불리는 의병들이 일어났다. 1906년 2월 호남의 최익현(崔益鉉)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편지를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역량이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임금의 군대인 관군(官軍)과 싸울 수 없고 일본에 무력 침략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10년간 교육에 전력한 뒤 천혜의 기회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1907년 일본의 차관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토지를 매각하여 100여 강전(鏹錢)을 마련하여 서울 의무소(義務所)에 보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 종일 통곡하고 수일간 단식하였다. 이후 외부 접촉을 끊고 은둔에 들어갔다. 일본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여 호적 등재를 거부하고 조선총독부가 양반과 유림을 회유하려고 지급한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하였다. 1911년 도연명(陶淵明)과 김길부(金吉父)의 절개를 따르겠다는 신념에서 이름을 두 인물의 성(姓)을 조합한 도(鋾)로 바꾸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성균관(成均館)을 폐지한 뒤 만든 경학원(經學院)의 경상남도 강사(講士)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였다. 같은 해 안동의 김세동(金世東)이 고종의 밀지라고 주장하는 문서를 보이며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때 고종에게 성급한 결정으로 화를 자초하지 말고 조용히 기회를 기다릴 것을 주문하는 동시에 원수 일본에 독립을 구걸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며 김세동의 행동을 중지시켜 달라는 내용의 상소를 내놓았다. 후일 그는 김세동이 위조된 밀지를 가지고 벌인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910년대 중반, 한때 동문이던 이승희·장석영(張錫英)과 함께 중국 망명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희는 중국 미샨(密山)에 대규모 한인촌인 한흥동(韓興洞)을 설립 운영한 경험을 가지고 1913년 남만주나 관내(關內)에 한인촌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며 곽종석의 조속한 합류를 기대하였다. 1912년 장석영은 망명지를 물색하기 위해 중국 남북만주를 직접 답사하였으며, 이승희와도 만나 계획을 조율하고 귀국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중국 망명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으나, 이승희가 펑톈(奉天) 부근의 랴오중현(遼中縣)에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고 1917년 이승희가 사망함에 따라 계획은 백지화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74세의 나이로 유교계 독립 청원 운동인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을 지도하였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를 계기로 유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같은 해 2월 19일 서울에서 활동하던 제자 윤충하(尹忠夏)가 찾아와 독립 청원 운동을 지도해줄 것을 요청하자 고종의 인산 일인 3월 3일에 맞춰 제자를 보내 논의케 하겠다고 답하였다. 한편,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준비하던 ‘민족대표 48인’측은 유교계 대표 인물인 그를 영입하기로 하였고, 그 일환으로 1919년 2월 23일 불교계 한용운(韓龍雲)이 다전(茶田)을 방문하였다. 한용운의 제안을 받았으나, 즉답을 피한 채 대리인을 상경시키겠다고 답하는 바람에 독립선언서 서명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2월 27일에는 서울에서 곽종석의 대리인 곽윤(郭奫)과 윤충하(尹忠夏)의 독립 청원 운동에 관한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결렬되었다. 대신 비슷한 계획을 지닌 김창숙(金昌淑)의 제안에 곽윤은 찬동하였다. 김창숙은 곽윤에게 서둘러 다전으로 내려가 곽종석에게 독립 청원 운동의 지도와 독립청원서 집필을 맡아달라고 요청케 하였다. 이어 3월 15일 김창숙이 다전을 방문하자 “이 늙은이가 망국의 대부(大夫)로 항상 죽을 곳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전국 유림에 앞장서서 천하만국에 대의(大義)를 소리치게 되었으니, 오늘은 늙은이가 죽을 곳을 얻은 날이다”라고 하며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하였다. 이후 김황(金榥)과 장석영의 초안을 토대로 독립청원서 일명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완성한 뒤 김창숙과 수차례 논의를 거쳐 최종안을 확정하였다. 이에 앞서 제자들을 경상도 일원에 파견해 거사 소식을 전달하고 동지를 규합케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창숙을 국외 파견 대표로 임명하고, 중국에 있는 한인 독립운동가와 중국 정계 인사와의 협력 방안에 대해 자세히 조언하였다. 이후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유림과의 연대가 이루어져 김창숙은 유림 137명의 서명이 포함된 독립청원서를 휴대하고 출국하였다. 4월 초 파리장서운동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열풍이 일어나자, 4월 19일 거창헌병대에 연행되었다. 이어 대구경찰서를 거쳐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고,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의 판결을 받았다. 판사가 항소 여부를 물었으나 “반드시 항소하고자 한다면, 응당 우러러 상천(上天)에 항소하겠다”라며 거절하였다. 7월 19일 중병으로 형(刑) 집행이 정지되어 출옥하였으나, 10월 17일((음) 8. 24) 고령과 옥고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사후(死後) 6년 뒤인 1925년 그의 유문(遺文)을 모아 문집을 편찬하기 위한 사무소가 서울에 개설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문집 편집 작업이 마무리되어 원집 165권과 속집 13권, 총 63책 분량의 『면우집(俛宇集)』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인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거나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이 삭제되어 빈칸으로 남긴 채 간행되었다. 1983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 간행할 때에는 문집 초본에 있는 본래 내용을 토대로 삭제된 내용을 보충하였다. 『면우집』은 원래 한지에 인쇄될 예정이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인해 반은 한지, 반은 양지로 출간되었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봉곤⋮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