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영
具然英1864. 6. 20 ~ 1907. 7.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남한산성의진
- · 이천수창의소
- · 상동청년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남한산성전투
- · 백현전투
- · 청송 감은리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64년 6월 20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도척면(都尺面) 궁평리(宮坪里)에서 구철조(具哲祖)의 셋째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춘경(春景)이다. 대한제국 정부에서 일시 관직에 있다가 일제 침략이 자행되자 사직하였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광주군 실촌(實村)에 대대로 살며 대제학 등을 배출한 유력한 가문이었다. 이러한 가풍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통한 것으로 전해진다. 의병 활동 후 실촌읍 노곡리에 정착한 사실이나, 함께 활동한 의병 가운데는 안옥희(安玉熙) 등 광주 출신이 다수인 정황 등은 모두 이와 같은 지역적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5년 8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1896년 11월 공포한 단발령으로 인해 민족 자존의 상징과 존엄이 무참히 짓밟혔다. 이로 인해 단발령 공포 직후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항일 의병이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 거주하던 중 단발령이 공포되자, 김하락(金河洛)을 비롯하여 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 우국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한강을 건너 1896년 1월 1일 경기도 이천에 당도하였다. 이천에서는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과 협의하여 포군(砲軍) 100여 명을 선발하여 근간으로 삼고 인근 각지의 의병 모집에 나섰다. 이에 양근·지평 일대로 들어가 그 지역에서 300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또한 조성학은 광주, 김태원은 안성, 신용희는 음죽으로 파견되어 각 군(郡)에 소속된 포군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처럼 인근 각지에서 모집한 의병들이 이천에 모여 연합 의병의 형태로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이천수창의소에서 의병장 이하 가장 중요한 직책인 중군장을 맡아 지휘부에 참여하였다. 이때 창의대장에는 민승천(閔承天)이 추대되었고, 도지휘(都指揮) 김하락·도총(都總) 조성학·좌군장 김귀성(金龜性)·우군장 신용희·선봉장 김태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 뒤 의병부대의 편제는 수차 바뀌었으나, 시종일관 중군장의 직책을 맡았다. 1896년 1월 18일 이천 널고개(백현(魄峴))에서 일본군 100명을 상대로 매복전을 벌여 첫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백현 전투 승전 후 그 기세를 이어 패주하는 적을 광주 노루목(장항(獐項)) 장터까지 추격해 무기와 군량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현(梨峴)에 주둔하던 이천수창의소 의병은 2월 13일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군 200명의 공격을 받아 패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현 동쪽 입구를 지켜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불리한 전세를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현 전투 패산 후에는 원주 방면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모색하고 수백 명의 군사를 모았다. 이때 김하락은 심상희(沈相禧)가 이끄는 여주의병을 찾아가 재기 항전을 협의하였고, 대장 민승천은 죽산으로, 그리고 조성학은 영남 방면으로 내려가 각기 재기 방략을 찾고 있었다. 이에 사방에 흩어져 군사를 모아온 민승천·신용희·전귀석·김태원 등과 함께 2월 25일 광주 이현에 다시 모여 재기항전을 천명하였다. 이때 모인 의병 수는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새로운 의병대장에 박준영(朴準英)을 선임하였다. 한편, 이 무렵 광주 일대에서는 연합 의병과는 별도로 심진원(沈鎭元)을 주장으로 한 의병부대가 별도로 편성되어 2월 23일 남한산성을 장악하여 활동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의병은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의 인솔하에 서울에서 출동한 관군의 공세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심진원은 이천 연합 의병에 서한을 보내 합세를 요청하였고, 여기에 호응하여 이천 연합 의병은 2월 28일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광주의진과 합류하였다. 남한산성 점령 후 의병 지휘부에서는 적의 내습에 대비해 요충지마다 군사를 배치하고 수성에 만전을 기하였다. 수비구역을 분담할 때에는 중군장으로서 의병의 본부가 있는 중앙부를 맡아 지켰다. 그 외 선봉장 김태원은 남문을, 후군장 신용희는 북문을, 우익장 김경성은 서문을, 좌익장 김귀성은 동문을 각각 나누어 맡았다. 서울의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이 의병의 수중에 떨어지자, 일제는 큰 충격을 받고 이를 탄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다급해진 일제는 정부로 하여금 강화도에 주둔하던 정예 관군 300여 명을 남한산성으로 증파하도록 하여 성을 에워싼 채 의병을 압박하였다. 성 안의 의병과 성 밖의 관군 간에는 연일 크고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하지만 전투 때마다 지리적으로 우세한 의병에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관군은 기습 작전을 펴기도 하고 화공을 계획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공략전을 벌였으나, 그때마다 의병의 반격으로 번번이 격퇴당해 성에 접근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의병은 4월 3일 관군의 총공격을 받고 패산하고 말았다. 철옹성과 같던 남한산성 공략이 여의치 않자, 관군은 비밀리에 김귀성을 통해 박준영을 매수하였다. 의병장 박준영에게는 광주유수를, 좌익장 김귀성에게는 수원유수를 제수한다는 미끼로 이들을 매수한 것이다. 새벽 이미 정해진 계획에 따라 박준영이 서문과 북문을 열자 성 밖에서 대기 중이던 관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시에 성 안으로 몰려들었고, 당황한 의병들은 전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남한산성 함락 후에는 동지들과 함께 잔여 의병을 수습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뒤, 김하락을 의병장에 추대하여 영남 지방으로 내려갔다. 4월 9일 동지들과 함께 남행길에 올라 여주를 지나 제천·단양·풍기·순흥 등지를 차례로 거쳐 4월 20일경 안동 부근까지 이르렀다. 이때 유인석이 거느리던 제천의병의 한 분파인 서상렬(徐相烈) 부대로부터 연합 제의를 받아 항전 방략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후 5월 하순 의병 투쟁을 종료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 달 동안 청송·의성 일대를 전전하면서 수차 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5월 14일 청송 감은리(甘隱里) 전투, 5월 20~25일 의성군 금성산과 비봉산 일대에서 벌인 공방전 등이 그 대표적인 격전이다. 그 뒤 김하락 등이 경주 방면으로 남하를 계속한 데 비해, 5월 하순 3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이천으로 돌아왔다. 경기와 경상을 무대로 거의 반년간 전개한 의병 투쟁은 이로써 종료되었다. 1896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와 광주군 도척면 노곡리에 정착한 뒤 기독교에 투신하여 새로운 구국 투쟁의 길을 모색하였다.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모든 생각과 계획을 일소하시고 춘몽을 깨신 듯이’ 1897년 2월 서울 남대문의 상동교회로 스크랜턴W. B. Scranton 목사를 찾아가 입문하게 되었다. 상동교회는 당시 기독교 항일 독립운동의 본산으로 기능하던 교회로, 전덕기(全德基) 목사가 조직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가 그 중심에 있었다. 기독교에 입문한 뒤 교회 활동과 구국 투쟁을 일체화시켜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동엡윗청년회와 그 후신인 상동청년회에 참여하였고, 전덕기의 지도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899년 3월에는 이천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광주군 마장면 덕평리의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 이후 자신의 집에 노루목교회를 세웠는데, 집 앞에다 장대 끝에 십자가를 달아 세워놓고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1902년에는 지역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 직분인 권사가 되었다. 이 무렵 광주에서 이천 읍내로 이주하였고, 이천 구역 24개 교회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1902년경 기독교 신앙을 구국 투쟁으로 승화하고자 이천에서 애국 단체인 구국회(救國會)를 결성하였다. 구국회는 기독교 교리와 신앙에 따라 믿음·소망·사랑 등 세 가지 강령을 실천하여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구국회의 활동은 이즈음 이천·여주·광주 일대에서 기독 교세가 급격히 팽창함에 따라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직후부터는 이천·광주·여주 등지를 돌며 구국회를 기반으로 군중 집회를 열고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으며 을사늑약 철회를 촉구하였다. 또 국권 수호를 위한 인민의 단결을 호소하고 시장 철폐 등 비폭력 저항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이와 같이 이천을 중심으로 여주, 광주 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선도하게 되자, 일제는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일진회원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장자 구정서(具禎書)와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일본군의 심문을 받자 “이 땅에 와서 너희가 이처럼 무도한 강도질을 하는데 하나님이 무심하실 줄 아느냐. 동지들을 말한다면 일진회 놈들을 빼고는 모든 백성이 나의 동지들이다”라고 일제의 죄상을 당당히 성토하였다고 한다. 결국 구정서와 함께 1907년 8월 24일 총살을 당해 부자가 함께 순국하였다. 이천시 관고동 이천중앙교회 경내에는 1979년에 건립된 순국추모비가 있고, 이천시 창전동에는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준호⋮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