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강영효

姜永斅

1879 ~ 1949. 12. 8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강영효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남 증산(甑山)미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증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 · 한국독립당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6)

관련 사건

  • · 독립운동자금 지원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6) 1879년 평안남도 증산군(甑山郡)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5월 29일 차이나호를 타고 부인과 함께 하와이(Hawaii) 호놀룰루(Honolulu)에 도착하였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후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삶을 이어갔다. 1909년 7월 13일 국민회(國民會) 하와이 홀루알로아(Holualoa) 지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 부회장 한영준과 함께 지회를 운영하며 한인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이끌었다. 1911년에는 서기를 맡아 회장 김규섭, 부회장 안양화 등과 활동하였다. 1912년 9월경 미국 본토로 갔다가 12월경 몽골리아 선편을 통해서 말레이시아, 상하이(上海), 홍콩을 거쳐서 다시 하와이로 돌아왔다. 1914년 7월 26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 힐로(Hilo) 지방회 통상회에서 법무원으로 선정되었다. 회장은 김응섭, 부회장은 장봉희였다. 1918년 1월 박용만(朴容萬)과 이승만(李承晩)의 분쟁이 다시 일어났다. 이승만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던 하와이지방총회의 재정 운영이 문제가 되었다. 하와이지방총회장 안현경이 지방총회 재정을 남용하여 문제가 발생하자 박용만 측이 재정 조사를 요구하였다. 하와이 한인들이 지방총회에 납부하는 의무금의 남용을 묵과할 수 없게 되자 4월 4일 정봉용·장봉희 등과 함께 국민보안공동회를 조직하고, 한인들을 대상으로 중앙총회가 정상화될 때까지 공동회에 납부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1919년 3월 3일 박용만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에 몸담았고, 기관지 『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 The Korean Pacific Times)』 발간에 참여하였다. 1921년 3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조와 명칭 문제 등을 해결하려고 국민대표회준비촉진회(國民代表會準備促進會)를 조직하였다. 5월에는 국민대표회 소집을 위해 국민대표회준비회를 결성하였다. 이에 자극받아 10월 23일 하와이 한인들이 조직한 대조선국민대표기성회(大朝鮮國民代表期成會)의 재무원으로 선정되어 회장 황사용(黃士容), 부회장 신홍균(申洪均)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기성회의 목적은 한국 독립을 위한 최고 독립운동 기관을 조직하자는 것이었다. 기성회 활동과 함께 대조선독립단 부단장으로서 총단장 신홍균을 도와 이 단체를 법인으로 인가받았다.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하던 박용만이 군사 활동 전개를 위해 필요한 군자금 1,500달러를 요청하자, 단원 이상호(李相鎬) 등과 함께 하와이 한인들부터 600달러 이상을 모집하여 보냈다. 1923년 7월에는 대조선독립단 서기 겸 재무로 활동하던 함삼여가 사임하자, 그를 대신하여 서무를 맡았다. 1924년 1월 총서기로서 하와이 각 섬을 순방하며 한인들을 대상으로 독립단 조직 목적과 활동 방략을 설명하여 역량을 강화하였다. 1924년 2월 10일 총단장 김윤배와 함께 부단장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1925년 5월 12일 창간된 국한문 신문 『단산시보(檀山時報)』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13일 이두옥·최두옥 등과 함께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한인협회를 조직하였다. 한인협회의 목적은 최후의 1인까지 독립 달성에 노력하며, 민족주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데 있었다. 여기에 참여한 박상하·김진호가 위원제로 조직을 운영할 것을 제안하자 이에 동의하고 조용하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심국겸·김윤배·박종수 등과 함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참여하였던 인사 가운데 일부가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로 옮기자 6월경 조직과 임원을 개편하였다. 종전의 위원장을 폐지하고 회장 조용하, 재무원 이정두를 선정하였다. 이때 서기로 선출되었다. 1931년부터 하와이 대한인교민단(大韓人僑民團) 의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4일 제12회 교민단 통상의사회에서 의사장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교민단 총단장 손덕인·이정건 등과 함께 임시정부 후원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재건을 추진하였다. 1933년 1월 교민단 대의회에서 교민단 해체와 하와이지방총회 복구를 결정하였다. 1월 31일 하와이지방총회 임원 선거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인국민회 창립기념일인 2월 1일 취임하였다. 3월 1일 하와이지방총회 부회장으로서 3·1운동 기념식을 주관하며 한인들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3월 하와이지방총회 부회장으로서 매월 2원씩을 모집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항일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펀치볼 지방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3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에서 충칭(重慶)에 전경무를 파견하기로 결의하고 협찬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위원장 이홍기와 함께 서기로 참여하였다. 1944년 펀치볼지방회에서 재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회계검사를 담당하였다. 5월 재미 한인들의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조선연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에서 평의부 평의원, 검찰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45년 하와이지방총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부터 1945년까지 한인공동회 의연금, 국민의무금, 『단산시보』 특연금, 독립금, 대한인국민회 의무금, 3·1운동 기념금, 한미승전후원금, 군사활동 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자금은 미주와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항일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1949년 백일규의 국민보사 사임으로 잠시 신문 제작에 조력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8일 하와이에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현⋮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