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봉
康伊奉1880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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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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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5) 1880년 전라북도 금산군(錦山郡) 동일면(東一面) 구억리(九億里, 현재 제원면 구억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천(信川)이고, 당시 직업은 무부(巫夫, 무당)였다. 1908년을 전후하여 유종환(兪宗煥) 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유종환이 붙잡힌 뒤에는 문태서(文泰瑞) 부대에서 활약하였다. 유종환은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전직 관료인데, 전라·충청·경남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동신(金東臣) 부대에서 선봉장(先鋒將)을 지냈다. 당시 군자금은 부호가(富豪家)에 할당하여 거두어들인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때 주로 전북·경남 지역에서 유종환을 비롯한 동지 10여 명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음)12월 20일 유종환(兪宗煥) 등 의병 16명과 함께 경남 안의군(安義郡) 북상면(北上面) 치내동(致內洞) 이장(里長) 이씨(李氏) 집에 들어가 총 1정과 의류 등을 징발하였다. 이듬해 (음)1월 1일 전북 무주군(茂朱郡) 조치리(鳥峙里) 최만오(崔萬五) 집에 들어가 군자금 20원을 거두어들였다. 또 같은 해 (음)2월 28일에는 경남 안의군 북상면 월상리(月上里) 이장(里長) 집에 들어가 군자금 2원과 물품 2점을 징발하였다. 그리고 1909년 (음)4월 2일에는 안의군 북상면 치내리(致內里) 임진사(任進士) 집에 들어가 군자금 20원을 징수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4월 유종환이 일본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서울진공작전 당시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 호남창의대장(湖南倡義大將)을 지낸 문태서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무주(茂朱)·장수(長水) 등 호남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던 문태서는 1908년 11월 경남 안의·거창 등지에서 용기와 힘을 겸비한 수십 명의 의병으로 결사동맹(結社同盟)을 맺었고, 1909년 4월에는 5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용담·무주 등지를 돌며 의병 모집을 계속하였다. 군자금 모집도 함께 이루어졌다. 1909년 (음)6월 15일 문태서 등 8명과 함께 충북 영동군(永同郡) 양내면(陽內面) 입곡리(笠谷里) 이모(李某)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 20원을 징수하였다. 당시 문태서가 지휘하는 의병들은 서울의 일제 통감부(統監府)를 공격하기 위해 부대를 3대로 나뉘어 북상하다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목표를 바꾸어 이원역을 공격하였다. 이원역 공격은 1909년 10월 15일 밤에 제안으로 문태서 등 10여 명이 함께 계획하였다. 이때 경부선 철도 이원역을 불태우고 역사에 있는 일본인들의 재물을 징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원역은 경부선의 작은 역에 불과하지만 역사 자체가 일제의 물자 수송 및 교통 운송의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이에 부응하기 위해, 10월 29일 이 역에 거주하는 인부 10여 명의 지원을 받아 석유통 2개를 사용하여 역사와 그 건물 전체를 불태우고, 역에 있는 일본인 소유의 금전 200원과 물품 등을 징발하였다. 일제는 불안한 시국 상황을 염려하여 일본군 사령관 오쿠보 하루노(大久保春野) 대장의 귀국을 중지하는 소동을 빚었으며, 관련자들을 처벌할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원역 공격으로 경부선 철도 운행도 일시 중단되었다. 일제 경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붙잡혀 1910년 2월 4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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