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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진

高龍鎭

1850. 10. 1 ~ 1922.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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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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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高敞)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고창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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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파리장서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50년 10월 1일에 전라북도 고창(高敞) 신림(新林) 가평(加坪)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는 운서(雲瑞)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다. 부친은 가선대부 성제공(誠齊公) 시청(時淸)이고 모친은 죽산 안씨竹山安氏이다. 4형제 중 둘째이다. 임진왜란 당시 금산 700 의사의 지도자였던 고경명(高敬命)의 후예이기도 하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대유학자인 면암 최익현(崔益鉉)은 조정에 상소한 후 단식을 시작하였다. 이에 수남(秀南) 고석진(高石鎭), 만취(晩翠) 고순진(高舜鎭), 송천(松泉) 고예진(高禮鎭), 죽계(竹溪) 고제만(高濟萬) 등과 논의하여 면암과 뜻을 같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고석진·고제만·고예진은 충남 정산(定山)에서, 면암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이후 이들은 전 낙안군수를 역임한 돈헌(遯軒) 임병찬(林炳贊)을 만나 면암과의 연합을 도모하였고, 의병 결성에 동의를 얻었다. 뒤이어 고창에 돌아와 의병 100여 명을 소집하고 고순진으로부터 군량미 200석을 받았다. 그 밖에도 군량미 500여 석과 군자금을 수합하여 병기를 구비하였다. 같은 해 (음)12월 25일에는 면암을 비롯하여 고석진·고예진 등 200여 명의 유림, 지사가 충남 노성(魯城, 현 논산) 궐리사(闕里祠)에서 결집하였고, 논의 끝에 ‘창의선언격문’을 작성, 배포하기로 하였다. 여기에서 면암은 의병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인 1906년 음력 2월에는 면암을 비롯하여 고예진·고석진·고제만과 함께 임병찬과 합류하여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태인의병을 결성하였다. 임병찬은 모병과 연병의 지휘 책무를 맡았고 고예진은 연락과 동원 업무를 맡았으며, 김기술(金箕述)·유종규(柳種奎)·정시해(鄭時海)·최제학(崔濟學) 등도 여러 임무를 나눠 맡았다. 이때 김재구(金在龜)·강종회(姜鍾會)와 함께 포사(砲士) 30여 명을 이끌고 무성서원에 나타나자 선비들의 의기가 더욱 거세졌다 한다. 거의 일자를 (음)4월 13일로 정한 최익현 의병진은 일본 정부에 16개 조목의 죄상을 언급한 면암의 서한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이후 흥덕·정읍·순창·곡성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5일에는 정읍을 점령하여 무기를 접수하였고, 16일에는 순창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접전하였다. (음)4월 18~20일 순창 구암사(龜巖寺)에 머무르던 중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 군수 이건용(李建鎔) 및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아 교전하다가 정시해가 순국하였다. (음)윤4월 20일 해산할 때까지 의병 활동을 함께하였다. 이후 최익현·임병찬·고석진 등 13인은 일제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음력 7월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 위수영(衛戍營)에 투옥되었고 김기술과 양재해 등은 장 100대를 맞았으며, 고석진과 최제학은 감금 4개월 형을 받았다. 국권피탈 이후 1914년 무렵 고석진·고예진과 함께 1912년 고종의 밀명(密命)에 따라 임병찬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담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14년 2월에는 밀칙을 받고 종2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 독립의군부 회계총관(會計總管)에, 함께한 고예진은 서기관에 임명된 것으로 전해진다. 호남 지역 유림이 중심이었던 독립의군부는 면암 문인들이 다수 참가하는 가운데 비밀 조직을 구성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1916년 임병찬이 유배지인 거문도에서 순국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고석진·고순진·고제만·고예진 등과 함께 흥덕향교 명륜당에서 곡을 하고 상경하여 국장(國葬)에 나설 뜻을 함께 모았다. 고석진·고제만·고예진 등 5~6인은 상경하여 3월 3일과 5일에 상례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의 상을 3년이 아니라 1년으로 마치는 것은 상례에 어긋나고, ‘황제’가 아닌 ‘대왕’으로 위호를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며, 을사늑약(1905년)과 국권피탈(1910) 모두 협박에 의한 것이므로 순종이 다시 황위에 올라 자주독립을 선포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5일 상소를 제출한 직후 송주헌(宋株憲)은 체포되었다. 같은 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제안하고자 제출하였던 ‘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에 참여하였다. 호남 지역에서 파리장서 서명을 독려하던 유준근을 비롯하여 고예진·고순진 등과 뜻을 같이한 것이었다. 파리장서에는 40대 이상의 경남·경북 지역 유학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에 비하여 호남 지역의 서명 참여는 상대적으로 저조하였다. 유준근이 호남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인 명망을 지녔던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서명을 권하였으나, 구미 열강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굴욕적일뿐더러 국권 회복의 목표가 유교 부흥이나 종사(宗社) 회복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명에 거절하였기 때문이었다. 1910년대 이래 지속되었던 노사 학맥의 자정적 흐름 역시 한 원인이었다. 그런데도 10명 미만의 호남 대표들, 특히 송주헌과 김택주(金澤柱)의 사례는 학맥과 당파를 초월하여 유림이 서명에 나섰음을 보여준다. 파리장서운동에 가담한 호남 지역 인물들과 후손들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을 맺거나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등 시세와 사상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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