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서
具漢書1864. 10. 18 ~ 1930. 10.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산남의진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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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64년 10월 18일 경상북도 경주부(慶州府) 가사리(佳士里, 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매현리)에서 출생하였다. 문의공(文懿公)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의 12세손으로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만(敬萬), 호는 우산(友山), 이명은 희서(喜書)라고도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담력이 뛰어나 일찍부터 장사(壯士)란 별칭이 있었고, 총을 잘 쏘아 선사수(善射手)란 명성도 얻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에 분노하여 경북 영해(寧海)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종의 의병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해산하고,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국난 극복을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비서승(秘書丞)으로 있던 동엄(東广) 정환직(鄭煥直)이 고종의 밀조(密詔)를 받들고 맏아들 정용기(鄭鏞基)를 영남으로 내려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정용기는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과 함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였다. 산남의진은 본부 부서 외에 각 지역 활동 책임자를 파견하여 활동하게 하였는데 이때 김태언(金太彦)과 함께 영덕(盈德)·영해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의병은 당초 계획에 따라 관동(關東)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주진위대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간계에 속아 대장 정용기는 대구감영으로 붙잡혀 간 뒤, 중군장(中軍將) 이한구가 의병을 이끌었으나 형세가 불리해지면서 해산하고 말았다. 정용기는 정환직의 주선으로 풀려난 뒤 이듬해 4월 의병을 다시 일으켜 청송(靑松)·영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관동 지역으로 북상하던 10월 8일 죽장면 입암(立巖) 전투에서 참모장 손영각(孫永珏) 등 여러 부장과 함께 전사하였다. 청하(淸河) 지역 책임자로 파견되어 활동하던 중 정용기 대장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장례 의식을 치렀다. 그 뒤 영덕 지역에서 병사들을 모아 정환직 대장 휘하에서 도총장(都總將)에 올랐고, 청송 보현산(普賢山)과 영일군(迎日郡) 북동대산(北東大山)을 거점으로 청송·청하·영천·흥해(興海)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정환직 대장이 일본군에 잡혀 1907년 12월 영천에서 순국하자 구심점을 잃은 의병부대는 1908년 1월 영천 보현산(普賢山) 거동사(巨洞寺)에서 최세윤(崔世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다시 의진을 꾸렸다. 이때 부대를 본진과 지대(支隊) 체제로 전환하고 본진 외에 70여 명의 지역 책임자를 파견하였는데, 청하·죽장·기계(杞溪) 지역 책임자로 선정되어 북동대산을 거점으로 청하·영양(英陽)·영해·진보(眞寶)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7월 본진이 의성 접경 지역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한 뒤 피신하였던 대장 최세윤이 같은 해 8월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용동(龍洞)에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의병부대 대부분이 흩어졌으며, 이때부터 피신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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