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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봉우

桂奉瑀

1880. 8. 1 ~ 1959.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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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계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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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영흥(永興)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영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서북학회
  • · 신민회
  • · 광성학교
  • · 권업회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한인사회당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관련 사건

  • · 3.1운동
  • · 고려공산당 통합대회
  • · 자유시참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80년 8월 1일 함경남도 영흥(永興)의 관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7세부터 서당에 나가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4세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사기(史記)를 읽었다. 15세부터 24세까지 10년 사이 동학에 입교하기도 하고, 정감록(鄭鑑錄)·점술·사주·관상법 등과 함께 병서(兵書)도 공부하고, 도인(道人) 최통 선생을 찾아 헤매거나 정도령을 찾아 백두산 일대를 뒤지는 등 청소년 시기를 방황하며 보냈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과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읽고 마음을 잡았다. 1906년 10월 김정규(金正奎)·권영호(權永鎬) 등과 함께 영흥에 홍명(洪明)학교를 설립하고 한국의 역사, 지리와 한문을 가르쳤다. 1908년 기독교를 받아들여 1910년에는 함흥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영생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1908년에는 도쿄 유학생 출신들이 만든 태극학회(太極學會)에 가입하여 영흥지회를 결성하였다. 이동휘(李東輝)의 영향으로 영흥에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서북학회(西北學會) 지회가 설립되었고,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이동휘의 권유로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1년 1월 정창빈·오영선·장기영·도용호·김하구 등 이동휘의 추종자 30여 명과 ‘기독교 포교’라는 명목으로 대거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북간도 소영자(小營子)에 위치한 광성학교(光成學敎, 길동기독학당)에서 한국 역사와 조선지지(朝鮮地誌)를 가르쳤다. 아울러 청년 단체인 청년친목회(靑年親睦會)와 대동협신회(大東協新會)에 가입하였는데, 특히 대동협신회의 기관지인 월간잡지 『대진(大震)』의 책임주필로 활약하였다. 1912년 중등부 교재『조선역사』와 수신(修身) 역사 교과서인 『오수불망(吾讐不忘)』, 『신한독립사』를 저술하여 대동협신회에서 발행하였다. 이동휘 등이 1911년경 북간도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광복단(光復團)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광성학교가 운영자금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되자, 1913년 가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 자치기관 권업회(勸業會)에 참여하여 기관지 『권업신문』의 기자로 활약하였다. 1914년의 러일전쟁 10주년에 대비하여 이동휘·이종호·정재관·이동녕·이상설 등이 1913년 10월 말 11월 초 무렵에 조직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의 책임비서로 제1대 이상설, 제2대 정도령(正都領)인 이동휘 등과 함께 항일 광복 전쟁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권업신문』에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1914년 6월 28일부터 연재하기 시작하여 『권업신문』이 폐간되는 8월 29일까지 1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는 동맹국이 된 러시아 정부에 이동휘 등 36명의 한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과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받은 러시아에 의해 이동휘·이종호·이동녕·정재관 등 20명과 함께 추방되었다. 이후 다시 북간도 왕칭현(王淸縣) 하마탕(蛤螞塘)으로 도피하였다. 하마탕에는 이동휘의 부친인 이승교 등 가족들을 비롯하여 구춘선·김학규·임병극 등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의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로 중일간에 전운이 감돌자 이동휘·이종호·정재관의 주동으로 중국과의 연합을 통한 대일 전쟁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15년 5월 9일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일본의 요구에 굴복함으로써 이 계획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의 강력한 요구를 받은 중국 당국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1916년 11월 당시 중러 국경지대를 순방하며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던 이동휘가 하마탕에 돌아와 있었다. 이동휘는 부인 강정혜의 생일 10월 29일을 맞아, 훈춘에서 왕칭현 하마탕으로 이사한 가족과 동지들과 해후하려고 하마탕에 와 있었다. 21개조 타결 이후 룽징(龍井) 일본총영사관은 이동휘의 하마탕 방문 정보를 입수하고, 6,7명의 형사를 급파하여 이동휘 본가를 습격했으나, 동네 청년들의 제보로 이동휘는사전에 탈출할 수 있었다.이때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회령(會寧)으로 압송된 후, '치안법 위반'으로 영종도에서 1년간 금고형을 선고받고, 이후 고향인 영흥에서 3년간의 거주 제한 처분을 받았다. 1918년 12월 고향 영흥에서 거주 제한을 받고 있던 중 함경남도 덕원(德源)에서 보성전문학교 학생 강기덕(姜基德)을 만나 서울에서 항일운동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 수속을 밟는다는 핑계로 1919년 2월 27일 서울로 올라가 남문(南門) 안 봉래정의 신학생 숙소인 신행여관에 머물렀다. 이때 거사 일이 바뀌어 3월 1일 1시에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제2의 만세시위운동 지휘책임자였던 강기덕의 요청에 따라 세브란스병원 밀실에서 선언서 초안을 집필하여 건네주었다. 3월 3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참관한 후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가 영흥으로 귀환한 후 원산에서 망명 계획을 부탁한 바 있는 차장로(車長老)를 찾았다. 차장로의 소개로 강우규(姜宇奎)를 만나, 훗날 강우규 의거의 공모자가 되는 최자남(崔子南)을 소개받은 후,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망명하였다. 신한촌에 며칠 머무는 동안에 철혈광복단(철광단)에 가입하였고, 모친 등 가족들을 만나려고 북간도 하마탕을 방문하였다. 1910년대 민족운동 당시 동지들이 주도하는 북간도 국민회와 연계를 갖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단장에 선임되었다는 소식에 1919년 11월경 북간도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떠났다. 신한촌에 도착한 당일 거행된 단장 취임식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 노령의 국민의회가 통합되는 것을 반대하는 일부 단원들이 상하이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기획한 것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와 국민의회간에는 승인·개조 분쟁으로 당초의 통합 합의 협약이 깨지고, 일부 철광단 간부들에 의해 임시정부 반대와 국민의회 복설이 추진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임시정부 지지 입장과 철광단의 반대 입장이 맞서는 상황에서 다수 의견에 따라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떠났다. 1919년 11월 26일 상하이에 도착한 이후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북간도 대표의원에 선임되었다. 독립운동사 재료수집원, 『구국일보(救國日報)』 기자로 활약하는 한편, 이광수의 청탁을 받고『독립신문』1920년 1월부터 5월까지 거의 매호에 민족운동에 관한 매우 중요한 글들을 발표하였다. 이때 필명인 사방자(四方子)로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4회, 1920.1.1 1.10, 1.13, 1.22)를 발표하고,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아령실기(俄領實記)」(8회, 1920.2.26, 3.4, 3.13일, 3.18, 3.25, 4.1, 4.3), 「김알넥산드라소전(小傳)」(3회, 1920.4.17, 4.20, 4.22), 「의병전(義兵傳)」(7회, 1920.4.27, 4.29, 5.1, 5.6, 5.8, 5.11, 5.15)을 각각 발표하였다. 1920년 4월 19일 안정근, 이탁과 함께 임시정부 서간도 파견원에 임명되었으나 직을 사임하였다. 이동휘의 소개로 “국가 평등, 인종 평등, 세계 평등”의 이념을 가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한편 대동단은 『구국일보(救國日報)』 주필 황줴(黃覺, 黃介民)가 주도하던 단체로, 황줴는 일본 유학 중이던 1915년 말 김철수·윤현진·장덕수 등의 한국 유학생들과 대만의 펑화룽(彭華榮)과 함께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 또는 신아동맹단)을 조직한 바 있다. 신아동맹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한 일체의 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1920년 4월경 김립(金立)의 권고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사회주의 신수(社會主義 神髓)』를 읽고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곧바로 한인사회당에 입당하여 기관지 『자유종(自由鐘)』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즈음『독립신문』에 기고한 「경성노동회에 대하여」(1920.5.27)에는 사회주의적 인식이 반영되었다. 9월 초, 한인사회당은 한인공산당으로 개칭되며 조직을 확대·개편하였고, 이때 이동휘는 한인공산당의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김립은 이한영·김만겸·안병찬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인사회당선동출판부는 신문 『신생활』(『신대한독립보』를 개칭)과 잡지 『공산』(『자유종』을 개칭)을 출판하는 한편, 『공산당선언』을 번역·발간하였다. 1920년 12월 2일 원동공화국의 수도 치타에서 7인의 지역대표가 참가하여 개최한 한인공산당 중임(重任) 당원회의에 상하이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원동부(遠東部; 달이뷰로, 원동공화국 수도 치타 소재) 소속의 한인부(韓人部) 5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다른 위원으로 박애(朴愛), 김진(金震), 박창은(朴昌殷), 장도정(張道政)이 있다. 1921년 1월 16일에 열린 한인부 정기회의에서 박애·장도정과 함께 3인으로 구성되는 간부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선전선동출판부장에 선임되었다. 한인부의 선전선동출판부장으로서 1921년 2월 한인부의 기관지인『노동신문』을 창간하여 매월 4회 간행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극동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탄압으로 『노동신문』은 폐간되었다. 이르쿠츠크파는 동양비서부의 일방적 후원을 받아, 5월의 전한고려공산당대표대회 준비위를 한명세·남만춘·이성·채성룡·김철훈 등 자파 일색으로 조직하였다. 또한 참가 대표들에 대한 자격심사권을 확보함으로써 상하이파의 대회참가 여지를 박탈하였다. 이르쿠츠크파의 남만춘(南萬春)은 동양비서부장 슈미야츠키(B.Z.Shumiasky)의 명령을 받아 치타의 한인부를 해산하고, 하바롭스크에 있는 한인 공산 기관들을 해산시켰다. 장도정·김진·오성묵(吳成黙) 등 한인공산당위원회에서 발간하던 기관지 『신세계』도 폐간시켜 대표 파견과 활동할 권리를 박탈하였다. 슈미야츠키의 지도하에 이르쿠츠크에서 1921년 5월 4일에서 17일에 걸쳐 제1차 고려공산당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중국과 국내에서 32개의 공산주의 단체와 8,730명(1,880명은 현역당원, 나머지는 후보당원)을 대표한 83명이 참석하였다. 이 가운데 64명만이 표결권을 갖고 대회에 참여하였다. 특히 상하이에서 김만겸·안병찬이 참석하였는데, 이들은 40만 원 자금 문제로 이동휘·김립 등의 한인사회당 측을 반대한 인물들이었다. 대회는 동양비서부의 슈미야츠키가 모든 진행을 지도하였다. 대회 폐회 후 다음 날인 5월 18일 고려혁명군정의회와 동양비서부가 합동 회의를 개최하고 위원제의 임시고려혁명법원을 조직하였는데, 한인부 위원 4인에 관한 사건을 처리하려고 구성한 것이다. 이들 한인부 간부들은 원동부의 명령을 받고 한인부 문부들을 송부한 5월 9일 원동공화국 총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5월 16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이들의 체포와 압송은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가 주관한 것이었다. 동양비서부는 이어 5월 15일 상해파의 군사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 흑하 지방(마사노프)에 있던 김규면(金圭冕)·한운용(韓雲用)·박원섭(朴元燮)·우시욱(禹時旭)·주영섭(朱英涉)·안태국(安泰國)·임상춘(林常春) 등 13인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흑하 지방 현지의 친상해파적인 러시아 정치보안부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1921년 5월 18일 한인부 간부들과 함께 김철훈·채성룡·채동순 3인의 취조를 받았고, 5월 말 재판 결과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소비에트러시아 제5군단과 동시베리아군대 혁명법원에서 감형되어 3년의 징역 형을 선고받았다. 이동휘·박진순(朴鎭淳)·홍도(洪濤, 洪鎭義)구성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대표단이 1921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한 결과 석방되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 양파 대표단의 입장을 검토한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은 검사위원회로 하여금 제반 사실과 문건들을 검사하게 하여 5개 항으로 된 「국제공산당 검사위원회 결정서」(1921.11.15)를 작성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시참변을 조사할 유력한 검사위원을 선출하여 동양비서부에 의해 체포되어 있는 박애 등을 석방하여 모스크바로 파견할 것, 자유시참변으로 투옥된 80여 명 가운데 검사위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자는 곧바로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검사위원회가 상해파·이르쿠츠크파의 동수로 구성하도록 결정한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의 실권은 이동휘와 홍도에게 넘겨졌다.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 이동휘와 홍도가 이르쿠츠크를 방문하게 되자 이르쿠츠크파는 그 이전에 한인부 간부들로부터 ‘자과(自過)에 대한 회개’를 받아내고자 하였으나 이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좌절되고 12월에 서둘러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석방된 후 치타에서 조선인 청년회 잡지 『새사람』의 주필로 활약하였다.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고려공산당 통합대회가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되었다. 대회 개최 전날인 10월 18일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 제1차협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연합 간부와 주요 활동가들이 각각 9명씩 18명과 지도원으로 러시아공산당원 3명이 참석하였다. 상해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대회에는 북간도 옌지현 대표로 의결권을 갖고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 선출된 ‘통합고려공산당’의 중앙간부 10명에 포함되었는데, 신간부는 이동휘·홍도·박밀양(朴密陽, 朴允海)·김아파나시·윤자영(尹滋英)·장기영(張基永)·김진·성예완·김철수였다. 꼬르뷰로(고려중앙국 또는 고려총국)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다.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된 1922년 말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 머물면서 국내와 만주의 공산주의 운동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되기까지 교육, 집필 그리고 반종교·무신자 운동을 통한 한인 사회의 사회주의적 건설 과정에 주력하였다. 활발한 집필 활동은 원동에서 『선봉』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 『레닌기치』에 게재된 기고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923년 이만 ‘고려인회’의 촉탁으로 원동 조선인 소학교의 『조선력사』를 저술하였다. 1924년에는 연해주 학무국의 지정으로 일급학교용 한국어 독본 『붉은 아이』를 편찬하였다. 1924년 1월부터 6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제8호 중학교에서, 1926년 8월부터 1930년 3월까지는 블라디보스토크 노동학원에서 한국어를 교수하였다. 1930~1931년에는 초급중학교용 고려어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그해 5월부터 1933년 4월까지 하바롭스크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1933년 봄부터 1935년까지 극동 스파스크 스비기야노 소재의 국민학교에서 고려어를 가르쳤고,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북프로홀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1937년에는 강채정과 공저로 원동변강국립출판부에서 『고려어 교과서』를 편찬·간행하였다. 한인 사회의 문화적 볼셰비키화를 위해 활약하였다. 한인 사회에 남아 있던 종교와 전통적인 미신과 관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1929년 블라디보스토크현 당간부 선전과의 승인을 받아 오성묵과 함께 무신(자)동맹을 조직하였다. 고려인무신동맹의 요청을 받아 반종교운동의 근거자료로서 『고려인의 구력과 명절의 미신』을 저술하였다. 교육 문화 사업을 통한 한인 대중의 볼셰비키화 과정에서 두 개의 중요한 논쟁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하나는 1930년 11~12월에 오창환과 주고받은 『고려문전』 논쟁이고, 또 하나는 한자폐지론-한자제한론 논쟁이다. ‘고려문법통일에 대한 협의회’에서 한글 문법에 대한 협의와 토론을 거쳐, 오창환의 이론에 따라 저술한 『고려문전』을 비판하자, 오창환이 반박하는 형식으로 논전이 전개되었다. 한자폐지론은 1927년부터 시작된 ‘고려문자라틴화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한글라틴화운동’과 관련되어 진행되었는때 이때 한자제한론을 주장하였다. 1930년대에 『과학의 원수』(1930), 『동학당폭동(東學黨暴動)』(1932), 『조선역사』1~2권(1936), 3권(1953), 『고려어교과서』(1937, 강채정과 공저) 등을 저술하였다. 1936년 1월 28일에 작성한 「이력서」에는 1935년까지의 교육·저작 활동이 기록되어 있고, 1920년 3월에 베르흐네우진스크로 들어간 때까지의 민족혁명사업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1940년대에 카자흐스탄에서 『조선말의 되어진 법』(1941), 『꿈속의 꿈』(1940~1944), 『조선문법』(1947~1948), 『조선문학사』 1~2(1950)를 집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반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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