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基兆
洪基兆1865. 12. 19 ~ 1938. 7.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천도교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62)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장(1962) 1865년 12월 19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오신면(吾新面) 하양리(霞陽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도호는 유암(游菴)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어려서 용강군의 노옥림(盧玉琳) 등으로부터 한학과 붓글씨를 배웠다. 1893년경 황해도 강령(康翎)의 김유영(金裕永)을 통하여 동학(東學)을 알게 된 후, 1894년 10월 정식으로 입교하였다. 1896년 11월 홍기억(洪基億)·임복언(林復彦)과 함께 강원도에 가서 이종훈(李鍾勳)의 중개로 최시형(崔時亨)과 손병희(孫秉熙)를 만난 후 돌아와 포교에 힘썼다. 1896년 접주에 임명된 후 수접주(首接主)를 거쳐 1900년 평안도 대접주에 임명되었고, 1903년경 교호수 10,000호를 거느리는 창의대령(倡義大領)에 임명되었다. 1904년 손병희의 명을 받아 대동회(大同會)·중립회(中立會)·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갑진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1905년 12월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한 이래 1906년 12월 평양대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909년 예비도훈(豫備道訓), 1910년 신도사(信道師)에 임명되었다. 1910년대 평양대교구 대교구장과 천도교 도사로서 포교 확대와 교세 신장을 꾀하는 한편 천도교인의 교육을 위해 교리강습소를 운영하였다. 1919년 2월 말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개최한 49일 기도회 종료 보고회에 참석하고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고자 서울에 올라왔다. 2월 25일 전동(典洞)에서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으로부터 만세운동의 구체적인 계획과 “손병희 선생의 발기로 조선의 국권회복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을 준비 중이니 그대도 동지로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자 기꺼이 동참하였다. 2월 27일 손병희·최린(崔麟)·오세창·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천도교인들과 재동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28인과 함께 태화관 별 6호실에서 모여 한용운(韓龍雲)의 연설이 있은 후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고, 곧 민족대표와 함께 일제 관헌에게 붙잡혀 본정경찰서로 연행되어 혹독한 조사와 심문을 받았다. 이후 1년 반 남짓 지속된 재판기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심한 옥고를 치렀으나, 재판관에게 “조선인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이 일에 참여하였다”며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1심을 거쳐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 산입)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1년 11월 6일 풀려난 후 교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22년 현기관(玄機觀) 임시관장과 강원도 종법사(宗法師)·신도사(信道師) 등에 임명되어 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얼마 후 평남으로 돌아가 진남포종리원 주임종리사, 화성포(化成包) 포덕사 등을 맡아 포교 활동을 벌이며 학교와 강습소를 통한 교육 활동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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