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碩淳
崔碩淳미상 ~ 1925. 2. 25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대한통의부
- · 참의부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95)
관련 사건
- · 고마령참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장(1995)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와 출생일자는 알 수 없다. 다만, 동생 최석준(崔錫濬, 이명 : 崔錫俊)의 본적이 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군내면(郡內面) 대대동(大垈洞)으로 되어 있어 이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생연도는 동생의 출생연도인 1891년보다 앞선 것으로 짐작된다. 호는 백순(白淳)이며, 이명은 강기수(康記守)·필성공(必成功)이다. 1919년 만세운동 때 동생과 고향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동생 최석준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귀향하여 고향 삭주와 인근 창성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주도하거나 참여한 정확한 장소와 일시는 알 수 없으나, 삭주에서는 3월 5일부터 5월까지 각지에서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된 바 있다. 일제 정보문서에 1919년 4월 3일 중국 지안현(輯安縣) 서취보(西聚堡) 화전자(花甸子)에 거주하는 예수교도 최석준 등이 한족회(韓族會)의 결성을 계획하고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형제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곧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생 최석준은 1920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 조직에 참여하여 삭주군 경감(警監)에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남만주지역 무장투쟁 단체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입하여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2년 상하이(上海)의 임시정부를 다녀오다 안둥(安東)에서 일제에 붙잡혀 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고, 11월 14일 동지 이호영(李浩英)이 고문당하는데 분개하여 일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던 중 일제 경찰이 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만주로 건너간 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참여하여 집서지단장(輯西支團長)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남만주 일대에 흩어져 있던 보약사(保約社)·농무계(農務契)·향약계(鄕約契)·포수단(砲手團) 등의 단체와 의병계열의 인사들이 조직한 복벽주의 계열의 무장투쟁 단체였다. 도총재는 박장호(朴長浩), 총단장은 조맹선(趙孟善)으로 의병 출신들이 주도하였는데, 회원은 756명에 이르렀다. 최석순은 1922년 8월 국민대표회의 남만촉성회 주비위원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개편과 최고기관의 조직과 운영, 독립운동계의 대동단결을 촉구하였다. 1922년 1월경 대한독립단과 서로군정서 등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이후 전열을 정비하고,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통합되었는데, 문호개방을 천명하고 다른 단체 의 가입을 권유하여, 1922년 8월 23일 이른바 8단(團) 9회(會) 대표 71명이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 모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 개편하였다. 대한독립단원으로 대한통의부에 참여하여 의용군 제2중대장에 선임되었다. 대한통의부 의용군은 사령장 김창환(金昌煥) 아래 5개 중대와 유격중대와 헌병대의 독립소대가 소속되었다. 제1중대는 중대장 백광운(白狂雲) 휘하에 서로군정서 계열의 100명(전성기 800~900명), 제2중대는 중대장 휘하에 대한독립단 계열의 130명(전성기 600~700명), 제3중대는 중대장 최시흥(崔時興) 휘하에 천마산대(天魔山隊) 계열로 국내 진공작전을 주된 임무로 하며 병력은 미상(전성기 500~600명), 제4중대는 중대장 홍기주(洪基柱) 휘하에 대한독립단 계열의 50명(전성기 500명), 제5중대는 중대장 김명봉(金鳴鳳) 휘하에 의병 계열의 120명(전성기 500명)으로 구성되었다. 5개 중대 구성원은 계열이 달랐기 때문에 이념도 같지 않았다. 1922년 10월 14일, 복벽계와 공화계가 충돌하는 ‘서간도사변(西間島事變)’ 발생 이후 박장호·채상덕 등 복벽계가 이탈하여 의군부를 조직하였는데 이탈에 참여하지 않고 잔류하였다. 1923년 12월 초, 2중대 소속 20여 명을 지휘하여 압록강을 건너 평북 초산과 벽동군에 진입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고 귀환하였다. 다시 국내진공을 준비하던 2중대는 압록강을 건너 추격해 온 일본군 80여 명의 포위 공격을 받아 용맹하게 분전하였으나, 백낙원(白洛元)과 김관빈(金官賓)이 전사하였다. 의병 계열의 의군부의 이탈과 분립 이후, 통의부 의용군은 제1중대장 백광운 등이 나서 임시정부와 협의를 진행하였다. 결과, 1924년 4월 남만주지역 군인 대표 78명이 서명한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선언서에서 임시정부는 전 민족의 대동 통일적인 최고기관이므로 대한의 군민(軍民)으로 전 민족의 최고기관인 임시정부를 공고케 해야 하며 임시정부 군무부 하에 원수인 적을 격퇴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5월 임시정부 주만육군참의부(駐滿陸軍參議府)가 조직되었는데 군인 대표 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용군 중대(제1·2·3·5중대)와 유격대, 독립소대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의 참의부가 조직될 때 참여하였다. 참의부에서 제2중대장을 맡았다. 1924년 5월 19일, 휘하인 참의부 의용군 제2중대 1소대 장창헌(張昌憲) 이하 대원 8명이 평북 위원군 마시탄(馬時灘)에서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 일대 국경지대를 순시하던 조선 총독 사이토(齋藤實) 일행의 배를 기습 공격하였다. 사이토가 탄 배는 독립군의 기습공격에 혼비백산하여 대응도 못하고 도주했던 일은 국내와 일본 언론에 보도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참의부 내의 갈등으로 참의장 겸 제1중대장이던 백광운이 이해 겨울 문학빈(文學彬)의 부하 백병준(白炳俊)·백세우(白世雨) 등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참의부가 직면한 큰 위기를 참의장 겸 제2중대장을 맡아서 수습하였다. 이 시기 제2중대 휘하의 제1소대 2분대장 김창화(金昌化)와 부대원 7명은 평북 후창군 우항령에서 일제 경찰과 접전 끝에 적 1명을 사살하고 다른 1명에게는 중상을 입혔고, 후창군 성천면 내동의 영림창을 습격하여 소각하는 전과도 거두었다. 이해 7월에는 조응건(趙應建)·김만성(金萬成)·박영진(朴永鎭)·김봉서(金鳳瑞)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평북 초산에 진입하여, 밀정으로 악명 높던 이갑정(李甲廷)의 집을 소각하고 귀환하는 등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1925년 2월, 부대원을 이끌고 압록강에서 60여리 떨어진 산악지대로 비교적 안전한 중국 지안현 고마령(古馬嶺)으로 이동하고 향후 투쟁 계획을 협의하기 위해 5개 중대 군사회의를 열었다. 전창희(田昌禧)·최항신(崔恒信) 등 60여 명이 참석하여 5, 6일간 회의가 계속되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조선총독부는 초산수비대 120여 명과, 경찰대 65명을 합동 출동시켰다. 일본군 수비대는 월경할 경우 국제문제가 되기 때문에 압록강 북안에 대기하였고, 한국인 순사부장 고피득(高彼得) 등 경찰대가 6개 분대로 나뉘어 2월 24일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 25일 새벽 1시경, 회의 장소를 급습하였다. 일제 경찰은 먼저 고마령 골짜기에 있는 참의부 통신기관장 김명준(金明俊)을 체포해 회의장을 급습한 것이다. 고마령의 회의장에 있던 참의부원 6명의 대원이 전사하였고, 소대장 전창희·최항신 등과 일제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격렬한 육박전을 벌였으나 회의장에 있던 참의부 독립군과 함께 사망하였다. 참의부는 물론 만주 독립군 역사상 최대의 참사로, 참의부를 이끌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전사했던 ‘고마령참변’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박걸순⋮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