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종해
權鍾海1869. 6. 16 ~ 1922. 6. 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민용호의진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백담사 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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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69년 6월 16일 강원도 강릉(江陵)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자는 선명(宣明), 호는 성파(惺波)이다. 이명은 주성(周成)이다. 강릉 유림의 지도자이자, 민용호(閔龍鎬) 의병부대에서 의병 투쟁을 전개한 권인규(權仁圭)의 아들이다. 또한, 그의 장남 권기수(權基洙) 역시 관동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3대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6년에는 강릉 유림의 대표로 선정되어 성균관에 진정서를 올리고, 대동문우회(大同文友會)와 법부(法部) 평의회(評議會)에 고소하여 친일 군수 이재화(李載和)와 친일 거부(巨富) 이근우(李根宇)·조익환(曺翊煥) 등을 추방하라는 조서를 내리도록 종용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자 일제에 결사항전(決死抗戰)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해 일제에 의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원주진위대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 의무도통(義務都統) 이중희(李重熙), 지휘관 김도제(金道濟) 등을 은밀히 만나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항일 투쟁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였다. 원주진위대의 해산 군인들을 주축으로 한 이 의병부대는 강원 지역 의병 항쟁의 근간이 되었다. 원주진위대의 무기고에서 소총 1,600여 자루와 탄환 4만여 발을 확보하여 무력 항쟁을 준비하였으며,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농민과 해산 군인들을 의병 부대에 가담토록 하였다. 이후 관동 일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의 접전을 벌였다. 1908년 3월에는 수하의 의병들과 함께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백담사(百潭寺)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같은 해 5월에는 강원 정선 북면 단림(丹林), 인제 운두령(雲頭嶺) 등지에서 접전하여 수백 명의 일본군을 전멸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일본군은 같이 활동하던 이강년 의병장을 체포한 직후인 1908년 6월 6일 그의 본가에 침입하여 가옥을 전부 불태웠으며, 둘째아들 증수(曾洙)를 폭행하여 치명상을 입히고 어머니 김씨를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1909년 4월 강원 양양으로 옮겨 활동하던 중 밀정 김성서(金聖瑞)로부터 정보를 얻은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크게 타격을 입었다. 1913년에는 서울 지역의 의병 김종익(金鍾翊)과 의군부(義軍部)를 조직하고 유격장(遊擊將)이 되어 의거를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강릉 사주면(沙州面) 장재호(張在鎬)의 집에서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6년간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원, 충북 일대에서 무력항쟁을 이어가다가 다시 체포되었으며,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또다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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