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77. 8. 27 ~ 1946. 9. 9
지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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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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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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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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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77년 (음)8월 27일 서울 차동(車洞, 현 서소문)에서 아버지 홍재식(洪在植)과 어머니 청주 한씨 수동(壽東)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본명은 홍면희(洪冕憙)이고, 어려서는 봉근(鳳根) 또는 우봉(又鳳)으로 불렸다. 자는 성무(聖武)이고, 호는 만호(晩湖)· 만오(晩悟)이며, 필명으로 경환(警寰)을 쓰기도 하였다. 한자가 다른 홍진(洪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4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였다. 이후 한성재판소 주사로 근무하다가 1906년 시험을 통해 검사가 되었고,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발령받았다. 1908년 변호사 인원ㄱ가장을 받고, 1909년부터 평양에서 사무소를 차리고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이때 이규갑(李奎甲)을 알게 되었다. 이규갑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고 공주의 영명학교(永明學校) 교감을 지낸 인물로 평양의 남산현(南山峴)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직후 서울에서 이규갑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법조계·기독교계·유교계·학생 등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비밀독립운동본부를 두고 극비리에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3월 17일 이규갑·이교헌·윤이병·윤용주·한남수·김규·김사국·이민태·민강 등과 법관양성소 출신의 검사인 한성오(韓聖五)의 집에 모였다. 이 회합에서 정부의 이름은 ‘한성정부’, 정부수반의 명칭은 ‘집정관총재’, 각원은 ‘총장’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집정관총재에 이승만(李承晩)국무총리 총재에 이동휘(李東輝)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과 평정관·파리강회회의 대표 등을 선출하고, 정부의 헌법인 약법(約法)도 제정하였다. 이로써 한성정부 조직안이 만들어졌다. 한성정부의 수립은 13도대표자들이 주도하는 국민대회를 통해 공포하기로 하고, 4월 2일 인천만국공원에서 13도대표자대회를 소집하였다. 13도대표자대회는 일종의 국회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국민적 기반과 절차를 거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인천·수원 등 일부 지역과 종교계 대표들만 참석하였을 뿐, 지방대표들은 거의 참석하지 못하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의 임시정부 수립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4월 8일 한남수를 상하이로 파견하였다. 한남수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4월 15일경 이규갑과 함께 ‘한성정부 조직안’을 성냥갑 속에 숨겨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때 압록강을 건너면서 이름을 홍진(洪鎭)으로 바꾸었다. 상하이로 떠나면서 국민대회 개최와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일은 학생조직에게 맡겼다. 4월 23일 김사국(金思國)을 비롯한 학생들은 서울시내 서린동 봉춘관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13도대표자 명의로 된 「국민대회취지서」와 각원 명단 및 약법이 들어있는 선포문을 배포하였다. 이로써 한성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상하이에 도착하였을 때, 상하이에는 이미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4월 8일 국내에서 강대현이 가지고 온 ‘임시정부안’을 기초로 하여,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의 조직을 상하이의 인사들에게 알렸다.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였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오히려 황옥(黃鈺)과의 관계로 인해 밀정으로 몰리는 곤경을 당하였다. 황옥은 일제 경찰의 경시(警視)로 근무하면서 상하이행을 주선해 준 인물이었다. 4월 30일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7월 8일에는 법제위원장을 맡았다. 9월 11일 노령·한성·상하이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루었지만, 각료들이 취임하지 않자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를 찾아가 조속한 취임을 촉구하였다. 1921년 5월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고, 8월에는 대태평양외교후원회를 발족하고 간사장을 맡았다. 이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한국독립 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었다. 이승만과 서재필(徐載弼)을 참석대표로 선출하는 한편, 국내에서 각 사회단체와 지역 대표자 372명의 서명을 받아 「한국민이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글(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을 보냈다. 그러나 태평양회의에서는 한국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22년 4월 의장직을 사퇴하였다. 1922년 8월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할 때, 양측 인사들을 만나 타협을 도모하였다. 나아가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지만, 임시의정원 의원의 자격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면서 좌절되었다. 1924년 4월 법무총장을 사임하고 전장(鎭江)으로 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은거하면서 임시정부가 쇠퇴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통분과 절망」이란 글을 작성하였고, 『독립신문』에 ‘대중아! 모여라’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핵심 내용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의 대단결을 이루자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일정한 주의(主義)와 정강(政綱)을 마련할 것’과 ‘희생과 복종’이 요구된다고 역설하였다. 1926년 7월 8일 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행정수반이 되었다. 국무령으로서 추진해나갈 시정방침으로 3대 정강을 제시하고, 내각을 구성하여 무정부 상태를 수습하였다. 3대 정강의 핵심은 전민족이 단결한 정당(政黨)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역적 안배를 고려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한다는 방침하에 최창식(내무)·이유필(재무)·김응섭(군무)·조상섭(사법)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국무령으로 취임한 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전민족이 대단결한 정당을 조직하자는 ‘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7월 8일 안창호는 삼일당(三一堂)에서 연설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전민족이 대단결한 혁명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운동은 상하이에서 시작되어 베이징·만주 등 각지로 퍼져 나갔다. 유일당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이를 조직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1926년 12월 국무령을 사임하였다. 우선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산주의 세력의 대표자인 홍남표(洪南杓) 등을 만나 유일당 결성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공동으로 ‘전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상해촉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어 베이징(北京)·광둥(廣東)·우한(武漢)·난징(南京) 등지에서도 촉성회가 결성되었고, 1927년 11월 중국 관내의 5개 촉성회가 연합을 이루어 관내촉성회연합회가 결성되면서 유일당운동은 급진전되었다. 관내촉성회가 결성된 후, 1928년 1월 만주 지린(吉林)에 도착하여 각 단체의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유일당 결성을 종용하였다. 만주지역에서도 정의부·참의부·신민부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유일당 조직을 협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열렸지만, 기존의 단체를 연합하는 방법으로 하자는 단체본위조직론과 기존의 단체는 해체하고 개인을 중심으로 하자는 개인본위조직론 등 방법론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면서 결렬되고 말았다. 1929년 봄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우창현(五常縣)에서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고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생육사는 지청천(池靑天)·황학수(黃學秀)·이장녕(李章寧)·김좌진(金佐鎭) 등과 더불어 북만주 일대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이를 위해 농지를 매수하여 북만주 일대에 이주해 있던 한인들이 생활기반을 안정시키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1930년 7월 지린성 웨이허현(韋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지청천·박관해·신숙(申肅) 등과 함께 민족주의 세력이 대결집하여 조직한 것이다. 같은 시기 남만주지역에서는 조선혁명당이 결성됨으로써 만주지역은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중심으로 재편이 이루어졌고,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으로서 북만주지역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지도자 위치에 올랐다. 한국독립당은 1931년 11월 당군(黨軍)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자 당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항일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선임하여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다. 11월과 12월 남대관(南大觀)·신숙·지청천 등으로 하여금 중국의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호로군(護路軍)과 한·중 연합을 도모토록 하고, 이들과 연합하여 서란현 쌍성보 등에서 항일전을 펼쳤다. 1932년 말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연석회의를 열고, 당과 군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동만주지역으로 옮겨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동 중 길림구국군의 차이스롱(柴蔡世榮)·우이청(吳義成)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연합토군(中韓聯合討軍)을 결성하고, 경박호(鏡泊湖)·동경성(東京城)·대전자령(大甸子嶺) 등에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33년 10월 연합을 이루었던 길림구국군의 우이청부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면서, 산시(山市)역 부근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 김구로부터 중국 관내지역으로의 이동 제의를 받고, 1933년 11월 한국독립당 간부들과 함께 베이징을 거쳐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였다. 1934년 2월 난징에서 신익희(申翼熙)의 한국혁명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당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주도하는 통일운동에 신한독립당 대표로 참여하여 통일문제를 협의하였다. 1935년 7월 5일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 등과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중앙검사위원이 되었다. 두 달여만인 9월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소앙(趙素昻)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1937년 7월 난징에서 한국국민당의 송병조(宋秉祚)와 조선혁명당의 지청천을 만나 3당이 협력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하자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8월 17일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을 비롯하여 미주지역 6개 단체를 참여시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고 선전위원이 되었다.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난징을 공격해오자 피난길에 올랐다. 임시정부와 함께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이동하였다가, 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를 거쳐 1939년 5월 치장(綦江)에 도착하였다. 8월 치장에서 한국독립당 대표로 7당통일회의에 참석하고, 10월에는 한국독립당 대표로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의 3당 통일을 추진하였다. 1939년 10월 1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고, 10월 25일 내무장에 임명되었다. 11월 5일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위원 불겸직 원칙에 따라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1940년 5월 9일 우익진영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총사령부성립전례식에서 정부대표로 훈사를 하였다. 10월 8일 김구 주석 체제가 성립되면서 송병조와 함께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2년 10월 2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장에 선출되어 세 번째로 의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광복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합류하자 약헌개정위원회(約憲修改委員會)를 조직하여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였고, 1944년 4월 임시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943년 5월 8일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 10일 충칭(重慶)에 있던 각 정당 및 한인들이 모여 재중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할 때, 주석단 총주석에 선출되어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전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결의안」·「동맹국 원수들에게 보내는 전문」 등을 채택하였다. 1944년 1월 3일 임시의정원 부의장 최동오(崔東旿)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무위원 선출 방식을 위한 투표에서 여야 동수가 되었을 때, 의장으로 야당측이 주장하는 무기명투표안에 찬성하였던 사건을 계기로 탈당한 것이다. 헌법개정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여야의 대립을 수습하고, 4월 20일 헌법개정안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헌법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좌우연합정부가 수립되었다. 4월 26일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이 취임할 때 임시의정원 의장 자격으로 취임선서를 받았다. 1945년 2월 8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유동열(柳東說)·김붕준(金朋濬)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신한민주당은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결성한 정당이었다. 2월 28일 제37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소집하고, 정부측에서 요구한 「대독일선전요구안(對德宣戰要求案)」을 통과시켰다. 1945년 4월 11일 제38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의장으로 정부의 각원과 의원들에게 ‘행동’과 ‘희생’의 길로 나갈 것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신한민주당의 안으로 의정원 의장·임시정부 주석·광복군 총사령이 주체가 되어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추진하자는 독립운동자대표대회안을 제출하였다. 1945년 8월 10일 충칭에서 일제가 항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의 항복에 따른 향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8월 17일 제39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여, ‘화평공제(和平共濟)의 새 정신’으로 당면문제를 잘 해결해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회의에서 야당측이 국무위원 총사직을 요구하고, 이를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하다가 회의는 종결되고 말았다. 1945년 11월 5일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29명과 함께 충칭을 출발하여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11월 23일 주석·부주석 등 제1진이 국내로 출발한 후, 12월 1일 제2진으로 조성환(曺成煥)·황학수·조소앙 등 22명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하여 폭설로 인해 군산비행장에 착륙하여 이튿날인 12월 2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946년 2월 1일 명동천주교회당에서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선출되었다. 의장으로 과도정권 수립을 추진하던 중 심장천식으로 입원하여, 1946년 9월 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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