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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썬임삼

1868. 2. 11 ~ 1943.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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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린썬임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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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독립운동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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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동맹회
  • · 중국국민당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장(1968) 1868년 2월 11일 중국 푸젠성(福建省) 민허우현(閩侯縣)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초(子超), 호는 장인(長仁), 천파(天波)이다. 푸젠성(福建省)의 청지산(靑芝山)을 좋아하여 말년에는 청지노인(靑芝老人)이라 별서(別署)하였으며, 이외에도 호동노초(虎洞老樵)·소여려주인(嘯餘廬主人) 등으로 별서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 형편이 여의치 않았으나 조부대에 이르러 장사를 시작하면서 생활이 비교적 여유로워졌다. 3세 때 아버지를 따라 푸저우(福州)로 이사하였다. 6세부터 경서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염무(顧炎武)·왕부지(王夫之) 등 명나라 말엽에 활동하며 민족의식이 강했던 대학자들의 저작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아편전쟁 후 푸저우가 대외통상항구로 개방되면서 외국인들이 선교 목적을 위해 설립한 학교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1877년 미국교회에서 설립한 배원학교(培元學校)에 입학하여 1880년 졸업하였다. 1881년 미국 감리교회가 세운 학령영화서원(鶴齡英華書院, Anglo-Chinese College)에 입학, 1884년까지 공부하였다. 이 학교의 교과서는 모두 영어로 되어 있어 어린 나이에 일찍 영어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1884년 겨울 타이완(臺灣)으로 건너가 타이베이(臺北)전보국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1888년 봄 4년 만에 푸저우로 돌아가 부모님을 뵌 뒤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갔다. 1890년 결혼을 위해 푸저우로 가 이틀만 머문 뒤 다시 직장으로 복귀하였다. 1892년 부인의 병세를 살피기 위해 푸저우로 되돌아 왔다. 1893년 11월 부인이 사망하자 평생 재혼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타이베이로 돌아와 전보국에서 계속 근무하였다. 1895년 일본군이 타이완을 침략하자 항일군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하고 귀향하여 모교인 학령영화서원에서 잠시 교사로 재직하였다. 1898년 여름 재차 타이완으로 가 타이베이에 1년여 머물며 타이완의 애국지사들과 연계하여 반청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정탐의 감시가 심해지자 타이베이를 떠나 시험을 거쳐 타이난(臺南)지방법원 자이(嘉義)지부 통역으로 근무하였다. 항일지사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될 때마다 유리하게 통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덕을 보았다. 타이완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은데다 병이 나자 1899년 봄 푸저우로 되돌아 왔다. 푸젠과 타이완을 전전하던 생활을 접고 1902년 11월 상하이(上海)해관 직원 선발시험에 합격한 것은 인생역정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신지식을 접하기 용이한 대도시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구국사상이 더욱 강해지고 혁명사업에 직접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푸젠 출신의 혁명지사들은 상하이에 달문사(達文社)·성사(醒社) 및 숭실중학(崇實中學) 등을 세워 혁명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들과 접촉하기 시작한데다 이 무렵 쑨원이 영도한 두 차례 혁명기의의 영향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푸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사람을 푸저우에 파견하여 서보사(書報社)와 학생회 분회를 설립하여 혁명의 기운을 퍼트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1년 4월 동맹회가 광저우(廣州)에서 대규모 거사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사망한 89명 중 푸젠 출신 청년은 대부분 푸젠학생회 소속이었다. 푸젠학생회와 푸젠 출신 일본유학생들이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쑨원의 주장을 전반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8월 중국혁명동맹회(이하 동맹회)가 성립되자 푸젠학생회 전체 회원과 함께 가입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혁명 활동을 진행하였다. 일부 동지를 푸저우로 보내 혁명조직의 성격을 지닌 푸저우열보사(福州閱報社)를 창설하고 그 안에 동맹회 푸젠지부를 성립하였다. 상하이해관에서 7년간 근무하는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중 강연을 통해 군중에게 혁명사상을 퍼트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1909년 여름 지우장(九江)해관으로 전임되었다. 지우장 출신의 우티예청(吳鐵城) 등과 상당한 규모를 갖춘 심양열서보사(潯陽閱書報社)를 설립하였다. 각지에서 발행된 신문과 새로 출판된 도서들을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넓은 열람실을 갖춘 서보사에는 상인과 교육계인사 및 신군(新軍)의 장령들도 다수 드나들었다. 혁명을 선전하는 서보들이 대담하게 공개적으로 진열되어 있었음에도 신군 장령들의 엄호로 관청에 적발되지 않았다. 사회의 분위기를 개혁하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아 전족(纏足) 반대와 아편흡입 금지를 제창하고 위생과 청결을 강조하였다. 국화대회(菊花大會)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회 각 방면의 유력한 인사들과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지우장에 주둔하고 있던 신군 53표(標) 표통(標統), 지우장지부(知府), 경찰서장과의 관계가 깊어 혁명 활동을 진행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었다. 창지앙(長江) 유역의 혁명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우티예청 등과 상단(商團) 결성을 결정하고 무장 반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먼저 군사훈련반을 창설하였다. 신군 53표 군관 다수를 교관으로 포섭한 군사훈련반에서 직접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상단을 조직하여 상인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포대(砲臺) 사령 등 신군 동지들을 흡수하는데 주력하였다. 상하이 방면 혁명당과의 연락을 책임지고, 우한(武漢) 방면 혁명당원과의 연락은 우티예청에게 책임지도록 하였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기의가 폭발하자 19일 지우장해관을 사직하고 신군에 대한 책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지우장 주둔 53표 표통 마육보(馬毓寶)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23일 지우장 광복을 이끌어내었다. 10월 30일 지우장군정부 민정부장에 임명되었으나 비밀공작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 신분을 감출 필요가 있어 정식으로 취임하지 않고 부부장 라대전(羅大佺)에게 대리하도록 하였다. 마육보를 통해 난창(南昌) 주둔 27혼성협(協) 협통(協統) 오개장(吳介璋)을 움직여 10월 31일 난창 광복을 성공시켰다. 상하이에서 함께 푸젠학생회를 조직하였으며 당시 전장(鎭江) 주둔 신군 제18협 36표 제1영(營) 지휘관으로 있던 임술경(林述慶)에게도 영향을 미쳐 11월 8일 전장이 독립을 선포하도록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1911년 11월 4일 상하이가 광복되자 청국해군 주력함과 어뢰정 등 70여 척이 한커우(漢口)에서 후퇴하여 창지앙 하류로 향하던 중 11월 11일 지우장에 정박하였다. 이에 우티예청과 함께 각 함선을 돌며 혁명에 호응하도록 설득하여 11월 13일 청국함대의 혁명 참가를 이끌어 내었다. 12월 21일 장시성(江西省) 대표로 난징(南京)에 도착하여 각성도독부대표연석회의에 참가하고 12월 29일 쑨원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였다. 푸젠성 선출 참의원 신분으로 1912년 1월 28일 난징에서 개막된 임시참의원회의에 출석하여 의장에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의 소재지를 놓고 참의원에서 논의가 전개되자 대다수 의원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으나 정부의 베이징(北京) 이전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1912년 4월 2일 임시참의원에서 정식으로 임시정부의 베이징 천도가 결정되고 4월 30일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임시대총통 취임식이 참의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위안스카이가 검을 찬 군복 복장으로 참의원에 입장하려 하자 국회는 인민을 대표하는 최고기관이라며 제지하여 결국 위안스카이의 패검(佩劍)을 풀어놓게 하였다. 5월 1일 참의원 의장을 사임하였다. 1912년 8월 25일 베이징에서 국민당이 정식으로 성립된 뒤 푸젠으로 내려가 국민당 지부 설립에 관여하며 활동하였다. 그해 겨울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푸젠성 선출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1913년 4월 8일 정식국회가 개막되어 참의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에 선출되었다. 위안스카이의 전제사상과 민간의 민주사상이 충돌하여 발생한 제2차혁명이 1913년 7월 12일 정식으로 폭발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거사가 실패하고 위안스카이에 의해 11월 4일 국회가 해산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쑨원을 만나 12월 중화혁명당에 가입하였다. 1914년 봄 쑨원의 명에 따라 하와이를 거쳐 6월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국민당 미주총지부 부부장을 맡았다. 이때 위안스카이 토벌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쿠바로 건너가 3개월간 머물며 노력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모금을 위해 뉴욕에 머물고 있을 때인 1912년 2월 2일 국민당 미주총지부장에 지명되어 여름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온 뒤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이 무렵 국민당 미주지부에서 설립한 토원주향국(討袁籌餉局)의 이름이 민국유지회(民國維持會)로 바뀌면서 회장을 맡았다.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파나마운하준공박람회가 열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7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국민당 간친대회를 열고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귀국하여 쑨원에게 직접 전달한 18만엔 외에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부터 위안스카이가 사망할 때까지 미주에서 모금한 120만 엔을 도쿄(東京)의 중화혁명당 본부로 송금하여 혁명자금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1916년 봄 미주의 청년당원 중 20여 명을 선발하여 미국항공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들은 후일 국민정부 공군의 중요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해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7월 귀국길에 올랐다. 상하이에서 쑨원과 협의 후 베이징으로 가 8월 1일 개막한 국회회의에 출석하였다.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헌정상각회(憲政商榷會)를 발기하여 국회 내 국민당 동지들의 지지를 얻고 지방 분권, 성장(省長) 민선을 주장하였다. 1917년 4월 이후 중국의 제1차대전 참전문제로 정국이 어지러워지고 재차 국회가 해산되자 쑨원의 호법(護法)운동에 호응하여 일부 국회의원과 함께 베이징을 떠나 광둥(廣東)으로 남하하였다. 호법전쟁이 폭발하여 1917년 8월 25일 국회의원들이 광저우(廣州)에서 비상회의를 소집하자 참가하여 9월 1일 쑨원을 군정부 대원수에 선출하는 데 앞장서고 한동안 대원수부 교통총장을 대리하였다. 이후 한동안 남양 일대를 돌며 화교들을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4월 2일 군정부 외교총장서리에 특임되었다. 광서파 군벌과 결탁한 일부 국회의원이 군정부를 합의제로 개조하여 쑨원을 배척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광저우를 떠나 5월 7일 20여 명의 국회의원과 연명으로 군정부 개조 연기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18년 8월 소집된 비상국회 제1차 정식 전체회의에서 참의원원장 겸 헌법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차대전이 종식되자 1918년 11월 15일 쑨원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여 중국의 바람과 입장을 표명할 것을 권고하였다. 당시 상하이에서 저술에 몰두하고 있던 쑨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9년 2월 15일과 3월 4일 재차 쑨원에게 편지를 보내 파리강화회의에 ‘국민대표’로 참가할 것을 요청하였다. 3월 11일과 13일의 회신에서 쑨원은 국사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국제관례에도 어긋난다며 요청을 거절하였다. 1919년 8월 광저우를 찾은 김창숙(金昌淑)을 만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광서파 군벌이 광저우군정부를 좌지우지하자 1920년 3월 29일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향하였다. 그해 10월 29일 광서파 군벌이 축출되어 광저우가 수복되고 쑨원이 11월 29일 광저우에 도착하여 군정부를 회복하자 광저우로 되돌아갔다. 1921년 1월 12일 광저우에서 국회비상회의가 복회(復會)하여 의장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4월 2일 국회가 군정부 취소를 의결하고, 7일 「중화민국정부조직대강」을 통과시킨 뒤 제2조의 규정에 근거하여 당일 국회에서 쑨원을 비상대총통으로 추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5월 5일 국회에서 의장자격으로 쑨원에게 대총통 인수(印綬)를 수여하였다. 1921년 9월 3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사(專使) 신규식(申圭植) 일행을 만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1921년 10월 8일 쑨원이 국회에 북벌안을 제출하자 이를 통과시키고 동일 의장 명의로 해외동지들에게 공개서한을 발송하여 혁명경비 모금을 호소하였다. 1922년 10월 17일 푸젠성장(福建省長)에 임명되어 11월 1일 취임하였다. 푸젠의 재정상태가 어렵자 11월 28일 쑨원이 300만 원의 공채를 발행하여 급한 불을 끄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준비금 없이 지폐를 남발하는 것은 오히려 인민들에게 해만 끼칠 뿐이라며 거절하였다. 1923년 2월 8일 푸젠성장을 사직하고 광저우로 돌아가 황화강(黃花岡)열사묘 조성사업을 감독하였다. 같은 해 7월 24일 대원수 대본영 건설부장에 임명되고, 1924년 6월 13일 치하(治河)독판을 겸하였다. 재임기간 동강·북강의 수문 건설, 서강의 제방 축조, 주강의 준설 등 치수사업에 탁월한 치적을 남겼다. 1923년 10월 10일 광저우에서 열린 국민당 당무토론회에서 쑨원에 의해 주석으로 지정되어 국민당 개조사무를 책임지게 되었다. 10월 25일 9명으로 구성된 임시중앙집행위원회위원으로 지명되어 전국대표대회 소집을 준비하였다. 1924년 1월 20일 개막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의 주석단(主席團) 5인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되었다. 1월 30일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되고 2월 6일 신설된 해외부장에 지명되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베이징에서 사망한 뒤 묘지 선정과 건축 도안의 책임을 맡았다. 후일 난징 쯔진산(紫金山) 에 쑨원의 묘소를 조성할 때도 총감독을 맡았다.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민정부위원에 임명되었다. 9월 3일 랴오중카이(廖仲愷)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상무위원 5인 가운데 1인으로 지명되었다. 10월 4일 광둥외교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11월 23일 베이징 서산 벽운사 쑨원 영전에서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감찰위원 전체회의의 주석을 맡아 국민당에 개인 자격으로 가입한 공산당의 음모를 폭로하였다. 이후 서산회의파가 상하이에 따로 설립한 중앙당부의 상무위원 겸 해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난징·우한·상하이 세 방면으로 분열되었던 국민당의 통합기구로 1927년 9월 14일 중국국민당중앙특별위원회 성립이 결정되어 9월 17일 국민정부 상무위원에 지명되었다. 1928년 2월 7일 국민정부 위원에 추대되었다. 1928년 9월 27일 국민당의 최고정책결정기구인 중앙정치회의 위원에 추대되었다. 10월 8일 국민정부 위원 겸 입법원 부원장에 임명되었다. 1929년 1월 22일 국민당 교무(僑務)위원회 위원장에 특임되었다. 3월 27일 국민당제3기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 6일 재차 중앙정치회의 위원에 지명되었다. 1930년 2월 13일 신설된 당사사료편찬위원회 상무위원에 지명되었다. 동년 12월 4일에는 신설된 혁명채무조사위원회 위원에 지명되었다. 1931년 2월 교무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출국하여 필리핀·호주·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국가를 방문 교포들을 위로하고 각지의 당무를 시찰하는 한편 중앙당부 청사 신축에 필요한 경비모금을 위해 힘쓰고 10월 중순에야 귀국하였다. 그해 3월 2일 후한민(胡漢民)의 사직으로 공석이 된 입법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기간 1929년부터 계속 국민정부 위원을 연임하였다. 1931년 6월 14일 국민당 3기 5중전회에서 중앙정치회의 위원에 재선임되었다. 11월 22일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1931년 12월 15일 장제스(蔣介石)이 사직하자 국민정부 주석을 대리하였다가 12월 28일 국민정부 주석에 선임되어 1932년 1월 1일 정식으로 취임하였으나 수정된 「국민정부조직법」의 규정에 따라 실제 정치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일제의 도발로 상하이사변이 발생하여 1932년 1월 30일 국민정부의 뤄양(洛陽) 이전이 선포되자 정부 각 기관을 이끌고 뤄양에서 업무를 보다 6월 12일 난징으로 귀환하였다. 1934년 1월 25일 국민정부 주석에 연임된 데 이어, 1935년 12월 7일에도 주석에 연임되었다.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한 이후로도 당무에 관여하여 중앙집행위원, 중앙감찰위원을 지냈다. 이외에도 당사사료편찬위원회 위원, 무휼(撫恤)위원회 위원, 화교연관(捐款)보관위원회 위원, 혁명채무조사위원회 위원, 혁명훈적(勳績)조사위원회 위원 등 직책을 맡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11월 17일 국민정부의 충칭(重慶) 천도가 결정되자 11월 20일 정부와 함께 충칭으로 이동하였다. 1941년 4월 오랜 혁명동지인 우티예청이 국민당 비서장으로 취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사무를 총괄하게 되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청하였다. 1943년 5월 10일 국민정부에서 관저로 이동 중 발생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1943년 8월 1일 충칭에서 사망하였다. 이때까지 12년간 중국정부를 대표하는 국민정부 주석의 자리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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