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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애쉬모어 피치

1883. 1. 23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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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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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운동지원

지도 위치

광역 지역 대표 지점

이 위치는 미국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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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YMCA
  • · 로타리클럽
  • · 인성학교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한미협회
  • · 한국기독교인친한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1883년 1월 23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George Field Fitch, 이하 필드)와 어머니 메리 피치(Mary McLellan Fitch)의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와 아들 조지 애쉬모어 피치의 첫 이름(first name)이 조지로 같고 중간이름(middle name)만 다른 탓에 아버지와 아들의 행적을 혼용하여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 필드는 1845년 1월 28일 미국 오하이오(Ohio) 주 에이번(Avon)에서 태어나 허드슨에 위치한 아델버트대학(Adelbert College, 지금의 Western Reserve College)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신시내티(Cincinnati)에 위치한 장로교 계열의 레인신학교(Lane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했다. 필드는 신학교 시절부터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장모(丈母)의 반대로 해외 선교에 나서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 선교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신념으로 1870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그해 11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한 필드는 곧바로 선교 활동에 전념하였고, 1888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 중국지회장이 되었다. 또한 매달 발행되는 종교지 『The Chinese Recorder』의 편집장을 맡았다. 『The Chinese Recorder』는 종교지로서 자유주의 신학과 중국 민족주의를 다루는 아시아에서 인기가 높은 잡지였다. 1893년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치호(尹致昊)를 만나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개신교 선교와 영어 교육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평소 극동지역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필드는 윤치호를 통해 미지의 세계인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필드가 한국인들과 본격적으로 접촉한 것은 협화서국(協和書局, The Shanghai Mission Bookstore)을 통해서였다. 협화서국 위탁판매부에는 1914년 중국으로 건너와 난징(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 현 南京大學)에서 공부하던 여운형(呂運亨)이 1917년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평소 극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필드는 여운형과의 만남을 통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강압적인 식민 지배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상하이에서 중국 YMCA를 통해 중국인 및 외국인들의 성경공부 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던 아들 애쉬모어에게 여운형을 소개해 주었고, 애쉬모어는 주중 미국대사 예정자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의 환영파티에 여운형이 참가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필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재건된 대한적십자사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부터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대한적십자사는 1909년 7월 일본적십자사에 흡수되면서 없어졌다가 1919년 8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 안창호(安昌浩)의 명의로 대한적십자회 설립이 공포되면서 재건되었다. 대한적십자사 재건과 함께 미국에서는 한인구제회(韓人救濟會)가 조직되어 한국·만주·중국 등지에서 일본의 탄압을 받는 한인들을 구호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인구제회의 모금 활동이 어려움에 처하자, 필드는 중국에 있는 미국선교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구호품과 의연금 모집을 독려했다. 특히 1920년 4월에는 75세의 고령에도 미국으로 직접 건너가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에서 모금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상하이로 몰려드는 한인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기금모집 고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재정상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필드가 한국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자, 1922년 상하이 일본총영사는 상하이 주재 미국총영사에게 외교적 유감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필드는 1923년 2월 17일 상하이 자택에서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상하이 화이하이공원(淮海公园)에 안장되었다. 이처럼 아버지 필드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은 아들 애쉬모어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필드는 중국 내 선교 활동을 할 당시 아들 애쉬모어를 미국으로 보내 교육을 받도록 했다. 애쉬모어는 1906년 미국 오하이오주의 우스터대학(Wooster College)을 졸업한 뒤, 뉴욕에 있는 유니언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and Columbia University)에 진학하여 1909년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목사가 된 뒤 아버지가 활동을 하고 있는 상하이(上海)로 향했고, 12월 25일 도착해 중국 상하이 YMCA 총간사가 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상하이 YMCA 총간사로 중점을 둔 것은 매주 수요일 저녁에 진행되는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는 쑨원(孫文)·탕사오이(唐紹儀)·왕충휘(王寵惠) 등 중국 국민당 정부인사 뿐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사업가 쑹자수(宋嘉樹)·니치지에(聶其杰)·모우추(穆藕初) 등이 참여하였다. 더불어 상하이 로타리클럽(Rotary Club)의 창립멤버로 활동하면서 성경모임의 구성원들과 친분을 계속 이어나갔다. 1910년 여름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만났던 영국 브리스톨 출신의 여성 앨버타(Alberta Casterlin Kempton)와 결혼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영국으로 갔다. 영국 브리스톨에서 결혼한 뒤 모스크바를 거쳐 상하이로 돌아왔으나 1919년 2월 아내 앨버타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1923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김마리아(金瑪利亞)·황기석·손진실(孫眞實) 등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김마리아 등과의 동행은 아버지 필드가 한인들의 미국 유학을 도왔던 것처럼 애쉬모어도 한인들의 미국 유학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1924년 6월 제랄딘 타운젠드(Geraldine Townsend)를 만나 다시 결혼하였다. 제랄딘 타운젠드 피치는 1940년대 북미지역을 순회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외교활동을 지원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내 반일여론이 높아가는 가운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아내 제랄딘은 1942년 2월 27일에서 3월 1일까지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에서 한미협회(韓美協會)의 후견인으로 참가하여 2월 28일 「한국독립의 당위성」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다. 이때 제랄딘은 미국에서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등 언론에 한국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활동, 일본의 불법적인 한국 강점 사실 등을 미국사회에 알리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나갔다. 또한 미주한인사회에서 언론활동을 하던 김용중(金龍中)을 만나 한국독립운동 지원방향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1942년 미국은 랭던(William Langdon)이 작성한 「한국 독립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에 근거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불승인정책을 추진하자, 제랄딘은 이를 막기 위해 미 국무부장관 헐(Cordell Hull)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활동을 하였다. 한편,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본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되자, 애쉬모어는 중국인과 한인의 항일투쟁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32년 4월 29일 김구(金九)의 주도로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인들을 검문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일본의 검거를 피할 은신처를 물색하자, 애쉬모어는 자신의 집 2층에 김구를 비롯하여 엄항섭(嚴恒燮)·안공근(安恭根)·김철(金澈) 등을 약 한 달 동안 숨겨주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은신하면서 극도로 조심하였다. 김구는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았고,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도 필요할 때만 택시를 이용하여 외출하는 등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애쉬모어 자택의 전화 사용량 증가하자, 일제 경찰은 이를 의심하고 애쉬모어의 집을 감시하였다. 이에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국인 복장으로 위장시켜 자신의 차에 태워 상하이 외곽으로 탈출시켰다. 그러나 안창호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일제의 재중국 한인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프랑스계 언론사와 접촉하며 일본의 불법 행동에 대한 비판에 나섰다. 또한 프랑스 조계 경찰서장 에티엔 피오리(Etienne Fiori)에게 편지를 보내 상해교민단장이자 인성학교 교장 출신인 이유필(李裕弼)에 대한 압박을 중지하고 일본 경찰의 불법 행위에 대해 프랑스 조계 당국이 도움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1936년 9월 난징 YMCA 총간사로 임명되어 27년 동안 활동하던 상하이를 떠났다. 난징에 도착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노구교사건(盧構橋事件)을 일으키며 중일전쟁을 본격화했고 그해 12월 13일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의 군인·포로·시민을 가릴 것 없이 대량 학살극을 벌였다. 이에 난징에 있던 독일 지멘스사 난징지사장 욘 라베(John Rabe), 난징대학교의 미국인 교수 마이너 베이츠(Miner Searle Bates), 선교사 존 매기(John Magee) 등과 함께 일본군의 학살극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지대를 설정하고, 이를 운영할 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for the Nanking Safety Zone)를 조직했다. 그리고 국제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난징에서 벌어진 참극을 전세계에 널리 알려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했다. 이와 함께 난징에 있으면서도 미주 한인들의 생활개선 사업도 지원하였다. 1938년 4월 하와이 당국이 약 200만원의 비용으로 재개발사업을 시작하자, 한인거주지역 재개발사업을 위해 서신을 통해 하와이 당국과 협의를 주선하는 한편, 모금사업에도 관여했다. 1939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자 함께 이동한 뒤 충칭 YMCA 총간사가 되었다. 1941년 4월 미주 한인들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고, 대미외교를 전담할 기관으로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를 설치하였다. 이 때 이승만(李承晩)이 자신의 대미외교를 뒷받침 해 줄 조직으로 한미협회와 한국기독교인친한회(韓國基督敎人親韓會)를 설립하자, 중국에 있으면서도 하와이에 있는 부인과 함께 이 두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1920년대부터 쌓아온 중국 국민당정부 인사들과의 친분을 통해 조소앙(趙素昻)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중국 국민당정부 외교부장 쿼다이치(郭泰祺)에게 소개시켜 만남을 주선하거나 서한을 보내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한편, 중국에서 활동하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얀마 랭군(Rangoon)에서 충칭을 연결하는 버마로드에서 미군의 수송 활동에 참가하였다.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 중국 국민당의 정보와 임시정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며 미군의 대중국 작전을 도왔고, 중국에서 벌어지는 미군 작전에 고문으로 참가해 중국어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4년 란저우(蘭州) YMCA 총간사로 전임되었고, 1945년 전쟁이 끝나자 YMCA 총간사직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1946년까지 전후 복구를 위해 조직된 연합국구제부흥기관(UNRRA)의 중국담당관으로 활동했다. 1947년 7월 한국 YMCA 총간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파견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인연으로 이승만·김구 등 독립운동가들의 환대를 받았다. 한국에 체류하는 2년 동안 한국 각지에 YMCA회관을 설립하고 구호물자를 공급하였다. 한국전쟁기간 중 서울 종로에 위치한 YMCA회관이 훼손되자 복구 사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1951년 한국 YMCA 총간사직에서 물러나며 은퇴했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타이완의 담강대학(淡江大學) 물리학과에서 고문직을 맡았고, 1963년 모든 활동에서 물러나 캘리포니아주 클래몬트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김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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