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청진성
1898. 1. 4 ~ 1965. 3.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중국국민당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6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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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장(1966) 1898년 1월 4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칭뎬현(靑田縣) 고시(高市)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수(辭修), 별호는 석수(石叟)·성백(誠伯)이다. 부친은 청말 수재(秀才)로 항저우(杭州) 양급사범학당을 졸업하고 칭뎬현 교육과장과 소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1904년부터 집안 어른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 고시소학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집에서 단기간 보습 후 1913년 봄 라수이(麗水)의 저장성립제11중학에 입학하였다. 집안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을 저장성립제11사범학교로 전학하여 1917년 여름 졸업하였다. 1918년 항저우성립체육전과학교에 편입하여 한 달 만에 졸업하였다. 1919년 여수 추저우(處州)중학 졸업장을 빌려 바오딩(保定)육군군관학교에 응시하였으나 성적이 나쁜데다 신체조건도 왜소하여 탈락하였다. 결국 동향 출신 국회의원의 도움으로 제8기 포병과 예비생으로 바오딩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20년 봄 군벌 간의 전쟁으로 군관학교가 잠시 문을 닫자 광저우(廣州)로 가 월군(粤軍) 제1사 제3단에서 복무하고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였다. 1921년 10월 바오딩육군군관학교가 재차 문을 열자 학교로 복귀하여 1922년 6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저장성의 제2사 제6단의 배장(排長, 소대장)에 임명되었다. 1923년 2월 광저우로 가 대위계급의 건국월군(建國粤軍) 제1사 제3단의 부관장, 연장(連長, 중대장)을 맡았고 대원수부 경호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1923년 5월 쑨원(孫文)이 주도한 군벌토벌작전에 참전하여 가슴에 총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병원에 입원 중 당시 대원수행영 참모장이던 장제스(蔣介石)가 부상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1924년 9월 대위 계급의 황푸(黃埔)군관학교 특별관좌에 임명되어 교육부관직을 수행하였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에 포병과가 신설되자 포병과 교관 겸 포병대 구대장을 맡게 되었다. 1925년 2월 시작된 제1차 동정과 그해 9월 시작된 제2차 동정에서 포병을 이끌고 후이저우(惠州) 등지의 함락에 큰 공을 세워 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포병 제2대대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7월 국민혁명군의 북벌이 개시되자 장제스를 총사령으로 하는 국민혁명군 총사령부가 조직되었고 여기에서 중령 계급의 참모로 활동한 뒤 대령으로 진급하여 제1보충사단 제3여단장을 맡게 되었다. 1927년 1월 저장에 진입하여 저장 전역을 평정하고 쑤저우(蘇州) 함락에 공을 세워 4월 제21사 부사단장과 63여단장을 겸하였다. 6월 21사단장에 임명되고 10월 면직되었으나 곧 군사위원회 군정청 대리청장으로 복직하여 주상하이(上海) 판사처 주임을 겸하였다. 일시 하야하였던 장제스가 복귀하여 계속 북벌을 지휘하게 되면서 1928년 4월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경위사령과 포병집단 지휘관을 겸하였다. 이후 대대적으로 실력을 확충하여 3개 경위단을 조직하고 2개 포병단, 2개 헌병단을 관할하였다. 1929년 6월 제11사단장에 임명되었고 1930년 4월 중원대전이 폭발하자 토역군(討逆軍) 제2군 부군장을 겸하였다. 중원대전 중 18군 군장으로 진급하면서 제11사단장을 겸하였다. 중원대전이 끝난 뒤인 1931년 11월 4일 일본군의 군사연습을 참관하기 위해 상하이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군의 추계훈련을 참관한 외에도 도쿄(東京)와 나고야(名古屋) 등지의 일본 육군군관학교와 육군비행학교를 방문한 뒤 12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일본 체류 시 일본 군인의 상무정신과 기율복종에 특별히 유의하였다. 동시에 일본 군부의 중국침략 야심을 간파하고 귀국 후 장제스에게 적극적인 항전준비를 건의하였다. 1931년 이후 5년간 후난(湖南)·장시(江西)·푸젠(福建)·후베이(湖北) 등지의 초공(剿共, 공산당 토벌)을 지휘하였다. 이 기간 1934년 5월 루산(廬山)군관훈련단 주임·부단장 등을 겸임하여 국군 장령의 훈련을 주관하였다. 1935년 3월 군사위원회 위원장행영 육군정리처 처장 겸 육군정리처 군관교육단장을 맡아 항일준비를 위한 전국 육군의 정리계획을 마련하였다. 그해 여름 장제스가 쓰촨(四川)을 장래의 항일근거지로 경영하기 위해 청두(成都)에 머물며 아미(峨嵋)훈련단을 개설하였다. 8월 훈련단교육장을 맡아 장제스를 대신하여 쓰촨·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 3성의 군·정·교육 등 각계 간부에 대한 항일정신교육을 담당하였다. 10월 군사위원회 위원장 이창(宜昌)행영 참모장으로 전보되었다가 얼마 뒤 우한(武漢)행영 부주임에 임명되어 후난·후베이 접경지대의 공산당 토벌을 지휘하였다. 1936년 3월 산시성(陝西省) 북부의 공산군이 황허(黃河)를 건너 산시(山西)에 침입하자 초비(剿匪)군 제1로 총지휘에 임명되어 옌시산(閻錫山)을 도와 초비작전을 지휘하였다. 공산당 무장부대를 산시성 북부로 퇴각시키고 섬진수녕(陝晉綏寧) 4성변구 초비 총지휘에 임명되었다. 이 기간 옌시산과 중앙의 관계를 증진시켜 화베이(華北)의 대일국방 강화를 도모하였다. 같은 해 6월 양광(兩廣)사변이 발생하자 장제스의 명으로 3개 사단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였다. 이후 군사위원회 광저우행영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양광의 선후문제를 원만하게 처리하고 11월 다시 타이위원(太原)으로 돌아갔다. 1936년 12월 군정부 상무차장에 임명되어 장제스의 부름으로 4일 시안(西安)에 도착하였다. 상무차장에 취임도 하기 전 마침 시안사변이 발생하여 한동안 억류되었다가 장제스와 함께 풀려났다. 1937년 1월 제4집단군 총사령에 임명되어 퉁관(潼關)에 주재하였다. 6월 루산군관훈련단 교육장을 겸하였다. 전국 당·정·군 중요간부 7천여 명을 모아 전면적인 항전 준비에 대한 연구와 역량의 집중에 주목한 훈련단은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최대의 정신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 1937년 8월 13일 쑹후전쟁(淞滬戰爭)이 폭발하자 8월 15일 장제스의 부름을 받고 난징(南京)에 도착하여 전반적인 전략계획 수립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즉각 상하이로 가 실제전황을 시찰하고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상하이 일대에서의 전투를 확대하여 적들을 창지앙(長江) 하류로 유인하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지구소모전략 집행의 책임을 맡아 제3전구전적 총지휘에 임명되었으며 10월 4일 제15집단군 총사령을 겸하였다. 3개월간 쑹후회전을 지휘하여 일본군의 주력을 화둥(華東)전장에 묶어둠으로써 일본의 속전속결 전략을 분쇄시켰다. 상하이가 함락되고 충칭(重慶)으로 천도가 결정된 뒤인 1937년 12월 3일 제7전구 부사령장관에 임명되었다. 난징이 함락된 뒤 계속 항전의 군사·정치·경제 중심으로 우한의 전략적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이에 1938년 1월 1일 우한위수총사령부가 특설되자 총사령에 임명되어 부대의 정리와 훈련, 방호설비 구축에 힘쓰는 한편 창지앙 남안의 각 병단을 지휘하여 일본군의 서진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38년 2월 6일 군사위원회 정치부가 성립되자 부장에 임명되었다. 이외에도 낙가산(珞珈山)군관훈련단 교육장, 항공위원회 위원, 후베이성정부 주석, 제9전구 사령장관 등 직무를 겸하였다. 1938년 1월부터 6월까지 우한지구 당·정·군 중요 임무를 도맡아 항전 방책의 수립 및 군관·청년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 제2기 항전의 핵심인 우한 보위의 중책을 수행하였다. 1938년 7월 우한보위전이 시작되자 장제스의 지시로 한국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성립방안의 타당성을 검토하였다. 한인 각 당파가 모두 참여하며 성립 후 군사위원회 정치부가 장악한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의 지휘를 받는 조건으로 조선의용대 성립을 적극 지지하여 성사시켰다. 성립 이후로도 김원봉(金元鳳)에 대한 지원 업무를 담당한 군사위원회 정치부장 자격으로 조선의용대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하였다. 우한회전 후 적 점령구역 내 유격거점을 건립하기 위해 유격간부훈련반이 창설되자 부주임을 겸하여 유격간부 양성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39년 10월 전시 후방 근거지인 쓰촨의 안위를 책임질 제6전구가 후베이성 언스(恩施)에 성립되자 사령장관을 겸하였다. 1937년 당무위원회 위원을 맡으면서 국민당 당무에도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5월 12일 중앙훈련위원회 주임위원에 임명되었다. 1938년 7월 청년 훈련을 위해 설치된 삼민주의청년단 중앙임시간사회 서기장 겸 상무간사에 임명되었다. 1940년 6월 후베이의 전략요충인 이창(宜昌)이 일본군에 점령되자 전국위로총회 회장을 제외한 일체의 겸직에서 벗어나 제6전구 사령장관 겸 후베이성정부 주석 직무에 전념하였다. 이 기간 군사 방면에서는 수 차례 서진하는 일본군을 맞아 후베이 서부에서 대승을 거두어 쓰촨의 안전을 지켜낼 수 있었다. 또한 지방자치의 범위를 확대하고 계획교육을 실행하는 한편 ‘25감조(減租)’의 실행 등 전시 민생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여 정치방면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1942년 봄 버마전선에 파견되었던 중국원정군이 참패하고 일본군이 여세를 몰아 윈난에 침입하여 서남지역의 유일한 국제교통로가 단절되었다. 연합국과의 육상교통로를 확보하고 반격을 준비하기 위해 중국 최고군사당국이 원정군 사령장관사령부를 설립하자 1943년 2월 12일 중국원정군 사령장관에 임명되어 3월 12일부터 쿤밍(昆明)에 주재하면서 제6전구 사령장관과 후베이성정부 주석을 겸하였다. 중·미 쌍방의 협의에 따라 사령장관이 원정군에 대한 완전한 지휘권을 행사하고 미국은 훈련과 무기 및 물자의 공급책임만을 맡도록 하였다. 그해 1월에는 외교부장 쑹쯔원(宋子文), 중국전구 참모장 겸 주중미국 군사대표 스틸웰과 함께 중국군 30개 사단의 재정비와 훈련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무렵 미국 당국자로부터 장제스의 잠재적인 계승자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943년 4월 하순 일본군 10만이 창지앙 상류의 항로를 확보하여 충칭(重慶)의 문호를 파괴하고자 후베이 서부로 진공하였다. 격렬한 저항에도 전세가 호전되지 않자 상부의 지령으로 5월 15일 쿤밍을 출발하여 충칭을 거쳐 17일 언시에 도착하여 전투를 직접 지휘하였다. 6월 중순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2만 5천명을 사상시키고 비행기 45대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거두어 배도(陪都) 충칭의 문호를 고수하였다. 그 공로로 1943년 10월 9일 국민정부로부터 청천백일훈장을 수여받았다. 1943년 10월 쿤밍에서 고질인 위장병이 재발하여 다량의 출혈로 한때 위독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에 건강상의 이유로 충칭에서 휴양하였으나 원정군 사령장관직은 계속 유지하였다. 1944년 4월 17일 일본군이 중국 동북에서 화중(華中)과 화난(華南)을 거쳐 인도차이나반도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1호작전’을 전개하여 뤄양(洛陽)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5월 12일 휴양을 끝내고 허난(河南)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작전을 지휘하였다. 5월 25일 뤄양이 함락되어 퉁관(潼關)마저 위급한 상황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분전하여 일본군의 서진을 좌절시켰다. 6월 20일 충칭에서 장제스로부터 지령을 받고 이후 시안(西安)에 주재하였다. 7월 6일 제1전구 사령장관직을 이어받고 15일 정식으로 취임하여 지차(冀察)전구 총사령을 겸하였다. 이후 사실상 허난·산시(陝西)·허베이(河北)·차하르(察哈爾)·산둥(山東) 및 장쑤(江蘇) 북부의 당·정·군 일체 사무에 대한 지휘와 감독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시안에서 수시로 각 사단장 및 정치부 주임 등과 업무검토회의를 열고 한국광복군의 활동상황에 대한 보고를 접수하였으며 대적선전과 훈련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약 반년간의 노력으로 서북과 중원 각지의 혼란한 국면을 안정시키고 적절한 조취를 취하여 일본군의 서진을 저지하였다. 12월 1일 군정부장에 취임하여 전국의 군대에 대한 정리책임을 담당하였다. 장기간의 항전으로 물자가 결핍되고 군대 보급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각 부대는 보편적으로 병력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각 부대장들은 정원을 속여 이익을 챙기고 심지어 기회를 이용하여 밀수에 나서거나 장사를 하는 등의 행위가 일반적이었다. 이로 인하여 군대의 기율·정신·전력이 크게 영향을 받고 있어 대대적인 정돈이 불가피하였다. 정돈 과정에서는 각급 군사담당자와의 직접적인 충돌이 예상되는 험난한 임무였다. 국군의 주력을 충실히 하여 반격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하고, 관병의 생활을 보편적으로 개선하는데 목표를 두고 군대정리작업을 적극 진행하였다. 이 작업을 대일항전이 승리한 이후까지도 계속 진행하였다. 전시에는 적 점령구역 군정기구의 접수, 유격부대의 정리편제, 위군(僞軍)의 처치, 적군 포로의 이송, 적진을 탈출하여 귀순한 한적(韓籍) 사병의 광복군 배속, 군사기구의 조정 등 방면에 심혈을 기울여 구체적인 방법을 제출하고 집행의 감독을 담당하였다. 1945년 1월 9일 후방근무 총사령을 겸하였다. 항일전쟁 승리 후에는 미국과 협의하여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교(韓僑)와 일본군으로 끌려왔다 포로가 된 한적 사병의 이송 업무를 총괄 지휘하였다. 1945년 12월에는 중앙군사기구개조위원회 주임위원을 맡아 군대 정리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1946년 4월 3일 군사3인소조의 정부대표로 임명되어 저우언라이(周恩來)·마샬과 함께 정전 문제 등을 협의하여 국·공 간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6년 6월 군사기구의 개편에 따라 국방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자 7월 1일 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이에 앞서 5월에는 해군 총사령을 겸임하여 파벌간 알력 등 해군 내 적폐 해소에 주력하였다. 국공내전의 격화로 동북지역의 형세가 날로 엄중해지자 1947년 8월 29일 국민정부주석동북행원 주임을 겸하였으며, 9월 1일 선양(瀋陽)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이에 앞서 4차례 동북 각지를 시찰하고 현지의 실정을 파악하였다. 동북의 군사와 정치 및 일반 사회상황에 대한 투철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상화’를 준거로 삼아 정돈에 착수하였다. 그해 11월 1일 동북행원에 원래 설치되어 있던 정치위원회와 경제위원회를 합병한 정무위원회가 설립되자 주임위원을 겸하였다. 당시 동북에 잔류한 한인(韓人)의 보호와 구제에도 큰 관심을 보여 동북행원에 한교(韓僑) 사무를 전담하는 한교사무처 설립에 앞장섰다. 지병인 위장병이 심화되어 병가 요청이 받아들여지자 1948년 2월 5일 난징으로 되돌아가 휴양하였다. 5월 12일 참모총장과 해군 총사령을 비롯한 모든 본·겸직에서 물러나고 6월 상하이에서 위장의 3분의 2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뒤 10월 타이완(臺灣)으로 건너가 휴양하였다. 1949년 1월 5일 타이완성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인민지상, 민생제일’을 시정방침으로 삼아 시정 개혁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7월 18일 동남군정장관공서가 신설되어 장관을 겸임하였다. 1949년 12월 21일 타이완성정부 주석에서 물러나 동남군정장관에 전념하였다. 국공내전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 하였던 장제스의 복직을 맨 먼저 주창하였다. 1950년 3월 1일 장제스가 복직하자 행정원장에 추천되어 3월 8일 입법원에서 통과되었다. 3월 17일 동남군정장관공서가 철폐되어 행정원장에 전념하였다. 행정원장 재직 시 4년 경제건설계획의 제정과 실행을 통해 경제개발에 노력하는 한편 토지개혁과 지방자치를 실시하고 예산제도를 확립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1954년 3월 부총통에 당선되어 5월 20일 취임과 동시에 행정원장을 사임하였다. 1958년 7월 4일 부총통직을 유지한 채 재차 행정원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3월 22일 부총통 연임에 성공하여 행정원장을 겸하였다. 1963년 12월 3일 행정원장에서 사직하였으나 1965년 3월 5일 사망시까지 부총통직은 유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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