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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봉

金基鳳

1884. 4. 10 ~ 1907.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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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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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靈光)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영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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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호남창의회맹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4년 4월 10일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대마면(大馬面) 화평(禾坪) 마을에서 후은(後隱) 김용구(金容球)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상산(商山)이며, 이명으로 기봉(起鳳)을 사용하였다. 김용구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로 의병장 기삼연(奇參衍)과 동문수학하였다. 1896년 기우만이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분격하여 친일 내각 타도와 일본 세력 축출을 목표로 결성한 광산회맹소(光山會盟所)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1906년부터는 기삼연과 복수토적(復讐討賊)에 뜻을 함께 하며 일심계(一心契)를 결성하여 국권 회복을 도모할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김용구는 일심계원들과 매달 만나면서 거의(擧義)와 관련해서 협의하고 동조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때 뜻을 같이한 일심계원들은 대부분 노사 기정진 계열의 유생들이었다.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함께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국권 상실이 현실화하자 이들은 일심계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먼저 그해 8월 12일 김용구는 영광에서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영광읍을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러나 기삼연 의병부대가 10월 21~22일경 문수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주변 의병들이 결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김용구도 의병을 이끌고 와서 기삼연 의병부대와 함께 주변 의병의 합류를 주도하였다. 결국 전남 서부 지역 의병부대는 기삼연과 김용구를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1907년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그는 부친 김용구가 일심계를 결성했을 때부터 늘 함께하였으며, 호남창의회맹소 결성에도 함께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맹주로는 기삼연이, 도통령에는 김용구가 추대되었다. 그리고 선봉장에 김준, 중군장에 이철형, 후군장에 이남규 등이 각각 정해져 일사불란한 조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조직을 정비한 호남창의회맹소는 우선 곡식의 역외 유출 금지를 통해서 지역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방곡과 납세 거부 투쟁 등을 이끌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1907년 10월 말부터 다음 해 1월 말까지 치열한 항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주로 장성·영광·담양·고창·함평·무장 등 전라도 서부 지역을 활동 무대로 하여 각 읍의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 그리고 거류 일본인들을 습격하였다. 10월 29일 고창(高敞) 읍내에서 2차에 걸쳐 일본군과 접전하여 30여 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11월 3일 영광 법성포(法聖浦)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살해하고 일본 거류민이 살던 집을 방화하였다. 11월 5일에는 장성(長城) 오동촌(梧桐村)에서 일본군 20여 명을 포살하였고, 11월 7일 백양사(白羊寺)에서 30여 명의 일본군을 피살하였다. 그리고 11월 19일에는 함평(咸平) 선치(蟬峙)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10여 명을 피살하였다. 12월 2일 내원리(內院里)에서 일본군 15~16명을 포살하였고, 13일 고부 인촌리(仁村里)에서는 40명을 사살하였다. 15일 죽림리(竹林里)에서 일본군 15명을 포살하였고, 27일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100여 명을 포살하였으나, 의병 측의 사망자도 30여 명이나 되었다. 12월 중순경 순창군(淳昌郡) 복흥면(福興面) 사창리(社倉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하고 기삼연과 동서로 나뉘어 분진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소규모 유격전을 펼치면서 때론 분진한 의병부대와 연합하면서 항일 전투를 이어갔다. 이에 일제는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전개하여 함평 연안 지역으로 의병을 압박하는 포위 작전을 펼쳤다. 결국 기삼연은 1908년 2월 2일 순창에서 일본군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었으며, 김준 부대의 탈환 작전이 실패한 뒤 곧바로 재판 없이 총살되었다. 기삼연 사후 호남창의회맹소는 다시 김용구와 김준 등 몇몇 지도부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이후에도 일본군과 유격전을 활발히 전개해나갔다. 이에 앞서 부친 김용구와 함께 의진을 이끌며 무장·법성포·고창·장성 등지에서 전개된 항일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1907년 (음)12월 10일 흥덕 안치(鞍峙)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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