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致璟
致璟1885. 5. 21 ~ 1945. 6.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철산군 철산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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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9) 1885년 5월 21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철산면(鐵山面) 동부동(東部洞)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미곡상을 하였고, 1919년 3월 명흥학교(明興學校) 교장 심치규(沈致珪), 교사 안태영(安泰英) 등과 함께 철산군 철산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철산군의 만세시위는 3월 1일 선천군(宣川郡)에 갔다가 선천의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명흥학교 교사 안태영이 교직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지역의 기독교계, 천도교계 그리고 일반 사회인 측에서 각각 대표자를 모아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의한 후, 첫 번째 회의는 3월 3일 밤 동부동(東部洞) 유봉영의 집에서 열렸다. 이때 기독교계 인사로서 회의에 참석하였다. 네 차례의 회의에서 구체적인 방법과 실무들이 논의되었는데, 시위 날짜는 읍내 장날인 3월 7일로 결정하였으며 선언식 장소는 철산읍내 동부동(東部洞)에 있는 기독교 예배당으로 결정되었다. 특히 기독교 측에서 태극기 제작을 담당하기로 하여, 태극기 제작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3월 7일 정오,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예배당에서 울리자 미리 소식을 들어 알고 있던 기독교인, 천도교인, 일반 주민 등 철산군민 1천여 명이 예배당으로 모였다. 주최 측은 김영락(金永洛)의 사회 하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뒤, 선언서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시위대는 철산군청과 경찰서를 향해 만세를 부르며 행진에 나섰다. 거리와 장터의 읍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합세하여 시위 규모는 5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 일제 경찰의 지원 요청에 따라 철산에 증파되어 있었던 철도원호대가 시위대에게 해산을 강요하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시위대가 우편국 앞을 지날 때 우편국의 일본인 직원들이 만세시위를 조소하고 욕설을 하자 화가 난 시위대 일부가 이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러자 뒤에서 오던 일본군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총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이러한 폭력적인 진압으로 현장에서 7명이 사망하고 50명 가량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한 끝에 시위는 강제 해산되었다. 이 일로 일제 경찰이 주도자와 시위 지휘자, 선언서와 태극기 제작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곧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신의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징역 1년을 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1919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는 철산에서 명흥유치원의 설립을 후원하고 각종 모금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청년 사회단체인 운암친목회(雲暗親睦會)에서 활동하는 등 지역에서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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