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건영
吳乾泳1883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가좌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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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해남면(海南面) 오남리(梧南里) 출신이다. 1919년 고등법원 판결문에 37세로 기록된 것을 보아 1883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4월 일어난 가좌면(茄佐面) 취야리(翠野里)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해주군 가좌면(茄佐面) 취야리(翠野里)의 취야 장터 만세시위는 만세운동이 해주군과 전국 곳곳에서 확산되었던 4월 초에 발생하였다. 취야 장터는 옹진군(甕津郡)과 장연군(長淵郡)에서 해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유동 인구가 많았다. 그런 이유로 지역 내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은 취야 장터 장날에 만세시위를 기획하였다. 4월 3일 오후 2시경 가좌면 취야리 취야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경술국치 이후 평소 한국의 독립을 염원해왔기에 시위대에 합류하여 장터에 모인 6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염준호(廉俊鎬)는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최봉조(崔奉祚)·이진각(李鎭珏) 등이 수천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를 주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취야경찰주재소로 향했고, 시위대 일부가 주재소 안으로 진입하자 주재소장과 일제 경찰들은 뒷문으로 달아났다. 시위대 일부는 주재소 유리창, 전화기, 집기, 그리고 유치장을 부수면서 가좌면 사무소 집기 일부도 파괴하였다. 그러자 그 날 오후 3시경 일제 군경은 사격과 무력을 행사하면서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고 현장에서 붙잡기 시작하였다. 시위가 끝난 이후에도 군경은 시위에 참여한 인원을 색출하였다. 이때 시위대들과 함께 일제 군경에 붙잡혀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騷擾)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지만, 1919년 9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러자 평소 한국인으로서 독립을 희망했으며 “소요행동을 행하거나 혹은 타인을 배척하는 사상 또는 자기를 위하여 사욕(私慾) 등의 일은 결코 없는데도” 징역 2년을 받은 것은 억울하다며 상고하였다. 하지만 1919년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최종적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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