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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득

吳光得

1879. 12. 23 ~ 1947.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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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오광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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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水原)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수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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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2004)

관련 사건

  • · 수원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4) 1879년 12월 23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송산면(松山面, 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沙江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경운(金景源)·김경운(金京雲)을 썼다. 한문을 1년 정도 공부하였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확산되자, 송산면에서는 홍면옥(洪冕玉)·홍효선(洪孝善)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송산면의 첫 번째 만세시위는 3월 26일에 일어났다. 이 날은 사강리에서 세금을 납부하는 날이었으며,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구장인 홍명선(洪明善)의 집에 모인 12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열기로 합의하였다. 3월 26일 오후 5시 무렵, 주민들은 송산면사무소 부근으로 이동하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약 150명 정도였다. 이틀 후인 3월 28일, 다시 한 번 사강리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날은 사강리의 장날으로, 사강리와 그 주변 마을의 주민들과 함께 장터에 모여 있었다. 재차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두려워 한 일제 경찰은 점포 철시를 명령하는 등 적극적으로 시위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전 10시 무렵부터 사강리 장터에 모인 군중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어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오전 11시 무렵에는 홍면옥의 집에서 홍면옥·홍효선·김창준(金昌俊)·홍문선(洪文善) 등 주도적 인물들이 만세를 외쳤고, 만세시위를 벌이던 군중들은 오후 2~3시경 송산면사무소 뒷산에서 모였다. 이때 모인 송산면과 인근 주민 1천여 명과 함께 백포(白布)에 염색하여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로써 두 번째 만세시위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만세시위가 확산되자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부장 노구치 코우조(野口廣三)가 출동하였다. 군중 해산이 여의치 않자 노구치 코우조는 주도자로 보이는 홍면옥·이규선(李奎善)·예종구(芮鍾九)를 잡아 꿇어 앉혔지만, 홍면옥은 저항하면서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고, 노구치 코우조는 홍면옥을 향해 총을 발포하였다. 홍면옥은 총상을 입고 쓰러졌고, 이에 주민들의 분노가 고조되며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노구치 코우조는 자전거를 타고 남양(南陽)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주민들과 함께 도주하는 노구치 코우조에게 돌을 던지면서 추격해 그를 살해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살인죄로 징역 6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20년 5월 31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6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다시 한 번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0년 7월 5일에 최종적으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4년 1월 26일 이른바 ‘칙령(勅令) 제10호’에 의해 징역 4년 7월 20일로 감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영진(한역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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