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性烈
性1860. 10. 19 ~ 1934. 4.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서천군 마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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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60년 10월 19일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 한산면(韓山面) 종지리(種芝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9일 송기면(宋箕勉) 등과 함께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마산면에서는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한영학교(韓英學校) 출신의 송기면(宋箕勉)을 중심으로 기독교계 인사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송기면은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마산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3월 중순경 송기면으로부터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상황을 전달받는 동시에 그로부터 마산면에서의 만세운동 계획에 대해 제안받았다. 이에 이근호(李根浩)·임학규(林學圭)·송여직(宋汝直)·이동홍(李東洪)·노형래(盧亨來)·하중호(河重鎬)·유일동(劉一童)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송기면·송여직·이근호 등 동지들과의 논의를 통해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감안하여 인근 신장리 장터의 장날인 3월 29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고 3월 28일까지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구체적인 준비를 하였다. 3월 29일 오전 11시경부터 송기면·송여직 등과 함께 신장리 장터로 나와 준비한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송기면은 장터의 한복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송여직은 “우리 조선이 자주 독립하여 자유를 향유하고 장래의 안락을 도모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고 연설하였다. 이에 장터에 나온 많은 주민들이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송기면 등과 함께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대열을 조직하고, 시위대를 지휘하여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이를 경계하고 있던 이한규(李翰圭) 등 일제 경찰들이 즉각 출동하여 만세시위의 해산을 강요하였다. 이에 불응하고 계속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게 주도자로 인정되어 송기면·송여직 등과 함께 붙잡혀 순사주재소로 끌려갔다. 하지만 만세시위는 해산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연행자들을 대신하여 이근호와 나상준(羅相俊)이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순사주재소로 달려가서 연행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했는데, 이들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만세시위에 마구잡이로 주도자들을 체포하는 일제 경찰의 횡포에 더욱 분노한 주민들이 결집하면서 만세시위대의 규모는 더욱 커져 2,000명에 이르렀다. 만세시위대는 여전히 순사주재소 앞에서 연행자들의 석방을 요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일제 경찰이 송기면 등 체포된 주도자들을 석방하지 않음에 시위대의 분노는 더욱 높아졌다. 박재엽(朴在燁)·이동홍·고시상(高時相)·양재흥(梁在興)·정일창(鄭日彰)·김인두(金印斗)·이승달(李承達) 등이 시위대를 향해 “체포 구금된 인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하여 출장소를 공격하자” 선동하여 이동홍·고시상·양재흥 등과 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시위대는 순사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창문과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주재소 안으로 쳐들어가 책상과 의자 등 기물을 파손하고 일제 경찰들을 구타하고 체포자의 구출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송기면 등과 함께 구출되었다. 송기면 등과 함께 다시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한산(韓山)을 거쳐 서천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가 마산면과 한산면의 경계 지점에 도착했을 때, 시위대를 향해 서천군수 권익채(權益采)가 급하게 다가와서 “일제 헌병이 매복하여 있으니 해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무장한 일제 헌병의 탄압에 많은 희생이 예상되었기에 송기면 등과 협의하여 만세시위를 해산하였다. 이후 만세시위 참여자 색출을 위해 출동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천경찰서로 끌려갔다.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5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취소와 함께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 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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