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淵益
淵益1901. 8. 28 ~ 1992. 2.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6)
관련 사건
- · 안동군 임동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6) 1901년 8월 2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 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명으로 유양범(柳良範)을 사용하였다. 18세인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中坪洞, 현 중평리) 편항시장(鞭巷市場, 챗거리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평양(平壤)과 대구(大邱)를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안동군에서도 3월 13일 이상동(李相東)의 1인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여러 곳에서 만세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임동면에서는 유연성(柳淵成)이 주축이 되어 유동수(柳東洙)·박재식(朴載植)·유교희(柳敎熙)·박진선(朴晋先)·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이 모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주도자들은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인근에서 가장 큰 장이 열리는 편항시장에서 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유연성의 제의에 주도자들은 임동면 지역을 나누어 주민들을 각자 동원하기로 하였는데, 유교희가 임동면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이 거행될 예정임을 알리고 참여할 사람들을 모았는데 이때 주저 없이 동참하게 되었다. 거사 당일인 1919년 3월 21일, 아침 일찍 편항시장으로 향하였다. 장터에는 장꾼과 주민들로 붐볐으며,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오후 2시 유연성이 군중들 앞으로 나와 독립만세를 불러야 하는 이유를 연설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연성의 선창에 주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장터에 있던 장꾼과 주민들도 호응하며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에 동참하였다. 만세 소리에 급히 출동한 경찰은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붙잡으려 하였고, 이를 본 시위대는 경찰들에게 몰려가 제지하였다. 군중들의 기세에 놀란 경찰들은 주재소로 몸을 피하였다. 이어서 유연성·유동수·박재식 등 주도자들도 주재소로 향하자 시위대와 함께 이들의 뒤를 따랐다. 500여 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주재소에 있던 경찰이 권총을 쏘며 시위대를 위협하였으나 주도자들은 오히려 경찰을 제압하고 주재소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주도자들을 따라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몽둥이와 돌로 벽과 창문, 책상과 탁자 등을 부수고, 문서도 파기하였다. 경찰에게서 빼앗은 대검과 권총, 주재소 안에 있던 촌전총(村田銃) 2자루와 칼 3자루, 탄환 44발과 순사 제복 등을 모아서 모두 우물 안에 버렸다. 그리고 김영팔(金永八)·송병영(宋炳榮)·이두성(李斗星)·김영찬(金永讚) 등과 함께 경찰 숙사에 들어가 벽과 창문을 모두 부수고 가구와 의류 등도 모두 찢고 파괴하였다. 시위대의 저항에 주재소와 숙소는 겨우 지붕과 기둥만 남은 채 폐허가 되었다. 주재소 시위 이후 일부 군중들과 해산하였지만 1,500여 명의 군중들은 면사무소로 가서 면사무소 건물과 기물들을 모두 파괴하고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시위를 한 이후에 해산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만세운동 관련자 검거 작전으로 붙잡혔고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감되었다. 같은 해 5월 31일에 이른바 소요죄, 건조물손괴죄, 가택침입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곧 항소하였으며 같은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면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