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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환

兪永煥

1866. 11. 10 ~ 1943.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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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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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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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5)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정산시장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5) 1866년 11월 10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대박리(大朴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 해 4월 정산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5일의 정산시장 만세시위는 홍범섭(洪梵燮)을 시작으로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 정산면 백곡리(白谷里)의 유림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4월 5일 오후 3시부터 정산시장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일제는 헌병들을 즉각 출동시켜 만세시위의 해산 명령과 함께 폭력적으로 만세시위를 저지했다. 이와 함께 일제 헌병들은 중심 인물들을 파악하기 위해 선두에 선 사람들에게 붉은색 잉크를 뿌려 그것이 옷에 묻은 홍범섭 등 주도자 30여 명을 청양 헌병분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정산시장에서 일제 헌병이 만세주도자들을 강압적으로 연행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주변의 사람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에 만세시위대의 규모는 7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연행된 홍범섭 등을 대신하여 시위대는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지휘하였다. 그의 지휘에 따라 헌병분견소로 달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사망했고, 이날의 시위는 황망함 속에 흩어졌다. 정산시장의 만세시위는 다음날로 이어졌다. 4월 6일 아침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갔다. 연락을 받고 온 권흥규의 친인척들과 함께 시신을 인수하여 고인의 자택이 있는 목면(木面) 안심리(安心里)로 향하는 운구에 참여하였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선두에 세운 운구행렬이 지나는 길목마다 많은 주민들이 노제를 지내고, 통곡하며 운구행렬에 합류해서 행렬의 규모는 1,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지곡리(池谷里)를 지날 즈음 ‘독립만세’라고 쓰인 깃발이 배포되고, 통곡소리가 ‘대한독립만세’의 구호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제 운구행렬과 만세시위대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만세시위로 전환된 운구행렬을 해산시키기 위해 인근 지역의 헌병을 지원 병력으로 급파했는데, 공주(公州)에서 파견 나온 일제 헌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이동하는 권흥규의 운구행렬을 보자마자,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 결과 권흥규의 조카딸과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장응렬(張應烈)·윤광원(尹光遠)등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전날에 이어 벌어지면서 운구행렬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일제 헌병의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조사, 색출 과정에서 붙잡혔고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 인정되어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4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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