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禮道
道1896. 8. 15 ~ 1989. 3.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천안군 병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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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6년 8월 15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 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으로 유애다(柳애다)라고도 불렸다. 부친은 류중무(柳重武)이고 모친은 김은혜(金恩惠)이다. 큰아버지 유중권(柳重權)의 딸이 유관순(柳寬順)으로 사촌동생이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梨花女子高等普通學校)의 학생으로 유관순과 함께 1919년 4월 1일의 병천면(竝川面)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충북 진천(鎭川), 충남 홍성(洪城) 등지로 피신해서 거주하다가, 광복 후 서울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는 병천면 지역과 수신면(修身面)지역의 만세운동 준비 흐름이 하나로 합쳐져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만세운동 당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으로 사촌동생 유관순과 함께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2일 학교의 선배로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자금을 모아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다음날인 3월 13일 유관순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3월 16일 유관순과 함께 부친인 유중무(柳重武), 유관순의 부친이자 백부인 유중권(柳重權) 및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 등 지역 인사 20여 명과 모인 자리에서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전달하고, 독립자금의 모금을 호소하였다. 이와 함께 병천지역의 만세운동도 함께 제안하여 부친을 비롯한 지역 인사들의 적극적인 찬성을 받아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아우내 장터의 장날인 4월 1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고,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운동의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시기 수신면에서도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했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이순구(李旬求)와 홍일선(洪鎰善)은 3월 29일부터 같은 동리의 김교선(金敎善)·박영학(朴永學)·한동규(韓東圭)·이백하(李伯夏) 등과 만세운동을 논의하여 4월 1일 아우내 장터의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별도로 준비되고 있던 만세운동의 두 가지 흐름은 병천 지역에서 만세운동의 연락원으로 활동한 김상훈(金相勳)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3월 31일 밤 매봉산을 중심으로 천안으로 가는 길목인 수신면 산마루, 충북 진천(鎭川)의 고갯마루에 봉화가 올랐다. 이것은 다음날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신호였다. 4월 1일 아침 일찍 부친 유중무, 백부 유중권, 사촌동생 유관순을 비롯한 온가족이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동지들과 아우내 장터를 향해 출발하였다. 오후 1시 예정대로 조인원이 먼저 장터의 한가운데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유중권·조병호(趙炳鎬)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이것을 신호로 주변의 사람들이 품속에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중권·조인원 등의 지휘에 따라 유관순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병천 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이하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시위 해산을 명령했으나, 5명에 불과한 일제 헌병은 3,000여 명의 만세시위대에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시위대는 해산에 불응하고 더욱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수천 명이 동시에 외치는 우레와 같은 구호에 당황한 헌병이 발포함에 김상헌(金相憲)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철수하는 일제 헌병들을 쫓아가 일제 헌병의 발포에 격렬하게 책임 추궁을 하였다. 평화시위의 의미를 강조하는 조인원의 외침에 시위대는 진정되는 듯 했으나, 일제 헌병이 또 다시 발포하여 조카 유관순은 부상당했고, 백부 유중권이 사망하였다. 주민들과 함께 주재소로 쫓아가 평화시위에 무차별 발포한 책임을 격렬하게 추궁하였다. 이후 천안에서 철도엄호대가 아우내 장터로 지원 나와 병천 헌병대와 합세하여 또다시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여 모두 19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무력 탄압으로 만세시위를 강제 해산시키는 한편 만세시위의 주도자들 및 적극 참여자들을 붙잡았다. 이러한 혼란의 과정에서 동네 어른의 손에 이끌려 외가로 피신했고, 이후 일제의 만세시위 주도자 및 참여자 조사, 색출 활동이 외가로까지 미치자, 친오빠가 있는 충북 진천으로 피신하였다. 다시 충남 홍성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결혼한 후 광복할 때까지 숨어 지냈다. 광복 후 농촌계몽지도원, 반탁운동지도위원,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지방책임자 등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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