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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在天

在天

1873. 3. 23 ~ 1935.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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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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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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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정산시장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73년 3월 23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광생리(光生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정산면에서는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그는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을 참례하는 과정에서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자신의 고장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생각에서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가지고 귀향하였다. 홍범섭은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과 협의하여 면사무소 소재지인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의 장날인 4월 5일을 만세시위의 거사일로 결정하고 그 준비를 하였다. 만세시위가 예정된 4월 5일 홍범섭 등은 오후 3시부터 시장에 나온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으나,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즉시 해산을 명령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홍범섭 등 30여 명을 청양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로 강제 연행하였다. 만세시위 주도자들이 일제 헌병에 강압적으로 연행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700여 명으로 확대된 시위대는 연행자들을 대신하여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이끌었는데, 시위대의 선두에서 붙잡힌 만세시위 주도자들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다가 일제 헌병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권흥규가 사망하는 비극이 계기가 되어 만세시위는 다음날 목면(木面)으로 확대되었다. 다음날인 4월 6일 아침 전날에 이어 헌병주재소로 갔다. 시신 운구를 위해 권흥규의 친인척 및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이면서 대규모의 운구행렬이 형성되었다. 운구행렬의 선두에는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이 서고, 많은 만장(輓丈)이 줄을 이었다. 운구가 지나가는 연로 각 마을마다 노제를 올리고 통곡하며 많은 주민들이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운구행렬이 지곡리(池谷里)를 지나갈 즈음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들렸다. 이것이 신호가 되어 통곡소리는 ‘대한독립만세’의 구호로 전환되었고, 운구행렬은 만세시위를 함께 하게 되었다. 운구행렬이 대규모 만세시위대로 전환되자, 일제는 정산의 헌병파견대 외에 인근 지역의 헌병까지 다급하게 운구행렬을 향해 파견하였다. 목면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주(公州)의 헌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행진하는 운구행렬을 보자마자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崔胤安)과 상여꾼 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 등 여러 사람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재현되면서 운구행렬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날의 시위 직후 만세시위 참여자 색출에 나선 일제 헌병에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1919년 4월 22일의 즉결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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