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點登
點登1897. 3. 2 ~ 1954. 5.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안동군 풍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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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897년 3월 2일 풍산유씨(豐山柳氏) 집성촌인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남면(豊南面) 하회동(河回洞, 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이며, 이명으로 유벽우(柳碧佑)을 사용하였다. 25세 때인 1919년 3월 27일 자신의 마을인 풍남면 하회동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지는 가운데 3월 13일 안동면(安東面) 공신상회(共信商會) 앞에서 이상동(李相東)이 1인 만세시위를 한 것을 시작으로 안동군에서도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같은 달 17일 유림들이 주축이 된 예안면(禮安面) 만세운동에서는 1,000명이 넘는 군중이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도산면(陶山面)·임동면(臨東面)·임북면(臨北面) 등 안동군 전역에서 만세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풍남면 만세운동은 안동군에서 발발한 마지막 만세시위로, 시위가 있기 전날 밤에도 만운동(晩雲洞)에 사는 박재욱(朴在旭)이 풍산 경찰주재소 앞 도로에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를 펼치게 된 것에는 안동군에서 전개된 이러한 일련의 만세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학생 신분으로 안동군에서 일어나는 만세운동을 보면서 같은 마을에 사는 16세 이하의 소년들을 규합하였다. 소년들의 경우 대부분 법적인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만세시위에 쓰일 태극기를 직접 제작하는 등 비밀리에 시위를 준비하였다. 거사 전날인 3월 26일 오전 10시에 마을 주민 4, 5명에게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이라고 얘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소년 50여 명이 모이자 일단 해산시켰다. 다음날 거사 당일인 3월 27일 오전 11시 그는 마을 북쪽 부용대(芙蓉臺) 맞은 편 솔밭인 만송정(萬松亭)에서 소년 20여 명을 모이게 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소년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서부에서 동부로 한 바퀴 돌았다. 이들의 만세소리에 일본군 10여 명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고,이때 붙잡혔다. 시위에 참여했던 소년들은 짐작대로 부모들이 서약서를 제출하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붙잡힌 후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부터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를 기각하였다. 다시 상고하여 사건이 고등법원까지 올라갔다. 상고심에서 본인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행위가 보안법 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항변하였다. “대한의 독립을 동양의 평화주의적 도덕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지 보안법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조국의 독립이 동양의 평화에 부합하는 것으로 자신의 만세시위가 타당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해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이후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을 기념한 특면사면으로 4월 27일에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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