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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重武

重武

1875. 8. 21 ~ 1956.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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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柳重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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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天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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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천안군 병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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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5년 8월 21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 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일의 병천(竝川)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사람으로, 유관순(柳寬順)의 숙부이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는 병천 지역과 수신면(修身面) 지역의 만세운동 준비 흐름이 하나로 합쳐져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발전되었는데, 이 시위는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만세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만세시위 중 하나가 되었다. 병천의 만세운동은 당시 이화학당(梨花學堂)의 학생으로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1919년 3월 13일 귀향한 유관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월 16일 조카인 유관순으로부터 친형인 유중권(柳重權)과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이백하(李柏夏) 등 지역의 인사 20여 명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듣고 병천의 만세운동을 제안받았다. 유관순의 제안에 적극 찬성함과 동시에 만세운동 논의에 참여하여 아우내 장터의 장날인 4월 1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이후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의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한편 수신면에서도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에 참례했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이순구(李旬求)와 홍일선(洪鎰善)은 3월 29일부터 같은 동리의 김교선(金敎善)·홍일선(洪鎰善)·박영학(朴永學)·한동규(韓東圭)·이백하 등과 만세운동을 논의하여 4월 1일 아우내 장터의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백하는 두 지역에서 각각 준비되고 있던 만세운동 계획에 모두 참여하고 있었지만 비밀을 유지하고 있었고, 병천지역에서 만세운동의 연락원으로 활동한 김상훈(金相勳)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3월 31일 밤 매봉산을 중심으로 천안으로 가는 길목인 수신면 산마루, 충북 진천(鎭川)의 고갯마루에 봉화가 올랐다. 이것은 다음날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신호였다. 4월 1일 아침 일찍 친형인 유중권, 조카 유관순을 비롯한 온가족이 함께 만세운동을 함께 준비했던 동지들과 아우내 장터를 향해 출발하였다. 오후 1시 예정대로 조인원이 먼저 장터의 한가운데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유중권·조병호(趙炳鎬)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이것을 신호로 주변의 사람들이 품속에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유중권·조인원 등과 함께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이하 5명의 헌병들이 곧바로 출동하여 시위 해산을 명령했으나, 만세시위대는 해산에 불응하고 더욱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수천 명이 동시에 외치는 우레와 같은 구호에 당황한 헌병이 발포함에 김상헌(金相憲)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에 분노하여 철수하는 일제 헌병들을 쫓아가 일제 헌병의 발포에 격렬하게 책임 추궁을 하였다. 평화시위의 의미를 강조하는 조인원의 외침에 시위대는 진정되는 듯 했으나, 일제 헌병이 또 다시 발포하여 조카 유관순은 부상당했고, 친형 유중권이 사망하였다. 계속적으로 희생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유중권의 시신을 둘러메고 헌병주재소로 쫓아가 한국인 헌병 보조원 맹성호(孟星鎬)에게 평화 시위에 무차별로 발포한 책임을 격렬하게 추궁하였다. 이후 천안에서 철도엄호대가 아우내 장터로 지원 나와 병천 헌병들과 합세하여 또다시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여 만세시위를 강제 해산시키는 한편 만세시위의 주도자들과 적극 참여자들을 붙잡았다.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에 붙잡혀서 천안헌병분대에서 조사받은 후 법원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3년으로 감형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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