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중오
柳重五1888. 3. 15 ~ 1919. 4.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천안군 갈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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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88년 3월 15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 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자가 다른 유중오(柳重午)가 있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일 병천의 아우내장터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제 헌병의 흉탄에 피격되어 사망하였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유관순(柳寬順)의 활동과 일제 헌병의 야만스런 탄압으로 인해 만세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만세시위 중 하나이다. 이 만세시위는 천안의 병천(竝川) 지역과 수신(修身)·성남(城南) 지역에서 준비되던 2갈래의 만세운동이 하나로 합쳐져 전개되었다. 만세운동의 준비는 병천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유관순과 유예도(柳禮道) 등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의 귀향이 계기가 되었다. 3월 13일 서울에서 귀향한 유관순은 같은 달 16일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및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이백하(李伯夏) 등 지역의 유력 인사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와 함께 유관순은 병천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하여 이들로부터 적극적인 동의를 받아 만세운동 준비에 착수했다. 이 모임에서 만세운동의 거사일은 아우내 장터의 장날인 4월 1일로 결정하고, 「독립선언문」의 인쇄, 태극기의 제작 등 구체적으로 만세시위가 추진되었다. 수신면과 성남면 지역에서는 병천 보다 늦은 1919년 3월 29일부터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했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이순구(李旬求)·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 등을 시작으로 한동규(韓東圭)·박영학(朴榮學)·이백하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도 아우내 장터의 장날인 4월 1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고 시위 준비에 착수하였다. 병천과 수신 및 성남 모두에서 만세시위의 장소를 아우내 장터로 결정한 배경에는 이 장터가 멀리는 충북의 청주(淸州)·진천(鎭川), 가까이는 천안군(天安郡, 현 천안시) 내 각 면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큰 장이었기 때문에 그 만큼 만세운동의 효과가 클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병천과 수신·성남 양쪽의 만세운동 계획에 모두 참여하고 있었던 이백하는 비밀을 유지하였고, 병천 지역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던 김상훈(金相勳)을 통해 두 지역의 만세운동 계획은 하나로 결합되었다. 두 지역의 만세운동 기획자들은 3월 31일 밤 매봉산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인 수신면 산마루, 충북 진천의 고갯마루에 봉화를 올렸다. 이것은 예정대로 다음날인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는 사전 연락이었다. 이에 다음 날인 4월 1일 아침 만세운동에 참여할 결의를 다지고 집을 나섰다. 아우내장터로 가는 길목에서 조병호(趙炳鎬)·조만형(趙萬衡)·박봉래(朴鳳來) 등이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의 참여를 독려하며 태극기를 배포하고 있었다. 이들로부터 태극기를 받아 옷 속에 숨기고 장터로 들어갔다. 4월 1일 오후 1시 장터 한가운데에 대형 태극기가 세워지고, 병천 지역에서 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했던 조인원이 나섰다. 그는 「독립선언문」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화답하듯이 곧이어 유중권·유중무·조병호 등이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이것을 신호삼아 일제히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품속에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수천 명의 인원이 한곳에 모여 동시에 동일한 구호를 외치자, 사방이 진동하였다. 이에 병천 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이하 일제 헌병들이 출동했다. 일제 헌병은 만세시위의 해산을 명령했으나, 3,000여 명의 만세시위대 앞에 고작 5명의 일제 헌병들의 힘으로는 시위를 해산시킬 수 없었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들과 대열을 형성하여 더욱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장터의 곳곳을 활보하였다. 이때까지 만세시위는 수천 명이 모였어도 지극히 평화로운 시위였다. 하지만, 만세시위대를 향한 일제 헌병의 발포로 인해 김상헌(金相憲)이 사망하여 첫번째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시위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제 헌병의 만행을 참을 수 없었다. 분노한 다른 주민들과 함께 일제 헌병들을 쫓아가 주재소 습격에 참여하였다.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일제 헌병의 발포에 격렬하게 책임 추궁을 하였다. 이렇게 만세시위의 양상이 격화되기 시작하자, 조인원이 다시 나서서 평화시위의 의미를 강조하며, 분노한 시위대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일제 헌병의 폭력적 탄압은 계속되었다. 일제 헌병의 칼에 유관순은 부상당했고, 그의 부친 유중권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렇게 사망자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조인원도 더 이상 시위대를 진정시킬 방법이 없었고, 조인원 자신도 일제 헌병에 칼에 부상을 입었다. 한동규·이백하·이순구·김상철(金相喆) 등의 지휘에 따라 1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쳐들어갔다. 주재소 내의 기물을 파손하고, 유치장 벽을 부수고 구금자를 구출하는 한편, 일제 헌병들의 지원 병력 요청을 차단하기 위해 김교선과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하지만 전화선을 절단하기 이전에 이미 천안으로 지원병력 요청이 전달되었다. 천안에서 급파된 고우(甲) 대위 이하 철도엄호대 6명이 오후 4시 아우내 장터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총을 쏘며 병천의 헌병대와 합류해서 만세시위대를 향해 집중 사격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 헌병과 철도엄호대의 만행에 맞서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저항하다가 일제 헌병의 흉탄에 피격되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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