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柳震玉

震玉

1871. 6. 26 ~ 1928. 10. 20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柳震玉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남 김해(金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9)

관련 사건

  • · 파리장서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9) 1871년 6월 26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우부면(右部面) 외리(外里, 현 김해시 외동)의 양반가에서 유치영(柳致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호(號)는 거인(居仁)이다. 영남의 대표적인 유림 중 한사람이자,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문하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던 「독립청원서」, 세칭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유림 대표 137명 중 한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이래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만세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는 한민족 전체의 거족적인 만세운동으로 확대, 발전하여, 해외에서도 한민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대한독립만세’의 구호가 외쳐졌다. 이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만세운동의 시작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독립선언서」의 작성 주체는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이었으나, 유림의 인사는 1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에 오랜 기간 한국 사회의 정치적·사상적 지주가 되었던 유림계 인사가 1명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유림들에게는 매우 부끄럽고, 심각한 사안이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이후의 국제질서를 논의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 조선총독부는 이완용(李完用) 등 친일파를 이용하여 한민족은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를 작성하도록 하고, 불원청원의 유림 대표자로 김윤식(金允植)이 서명하여 일본정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전국의 유림은 극도의 모욕감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표출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의 유림은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이후의 국제질서를 논의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희망하는 한국인들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모두 2,674자의 한자로 이루어진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직접 파견하여 이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여건 상 김창숙은 파리로 직접 가지 못하고,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이 「독립청원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당시 유림의 국제사회를 향한 독립청원운동의 주도 세력은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과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이었다. 영남지역에서는 곽종석의 학맥을 중심으로 독립청원운동이 전파되었다, 곽종석은 문하의 제자들을 영남 지역 곳곳으로 파견하여 독립청원운동에 유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평소 스승 노상직의 가르침을 통해 한국의 독립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던 중, 독립청원에 참가를 결정한 스승 노상직으로부터 독립청원운동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전달받았다. 이에 노상직 문하의 김정기(金定基)·안종달(安鍾達)·손상현(孫上鉉)·강신혁(姜信赫)·박상윤(朴尙允)·허평(許坪)·배종순(裵鍾淳)·이학규(李學奎)·안효진(安孝珍)·노도용(盧燾容)·이정후(李定厚)·박정선(朴定善)·이돈호(李墩浩)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유림의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에 유림의 1차 대표 137명 중 한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이후 경북 상주(尙州)에서 「독립청원서」에 유림 대표 137명 중 한사람으로 서명하고, 직접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송회근(宋晦根)이 1919년 4월 12일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받는 과정에서 유림의 독립청원운동, 즉 「파리장서」사건이 발각되었다. 이에 스승 노상직을 비롯한 다른 서명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나, 일제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유림들이 연루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최대한 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려 하였다. 그 결과 독립청원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곽종석, 김복한 등을 제외한 다른 일반 서명자들과 함께 미결수로 일제의 감옥에서 3개월 간 옥고를 겪은 뒤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