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學瑞
學瑞1895. 9. 20 ~ 1970. 3.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부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5년 9월 20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길상면(吉祥面) 선두리(船頭里,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신자였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부내면(府內面, 현 강화군 강화면) 읍내 장터에서 거행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강화군에서는 길상면 출신의 대한제국 군인이었던 유봉진(劉鳳鎭)을 중심으로 운동이 추진되었다.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고향으로 피신한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학생 황도문(黃道文)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를 얻은 유봉진은 동지들과 함께 온수리(溫水里)의 감리교회당에서 이 문서들을 등사한 다음 3월 18일 읍내 장터에서 궐기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후 강화군 내의 마을들을 순회하며 사람들에게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독려하였다. 3월 14일 기독교인이자 유봉진의 동지였던 염성오(廉成五)로부터 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 계획을 전달받아서 만세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의하고, 3월 15일 허성택(許聖澤)에게 문서를 전달하여 동참을 권유하였다. 3월 16일에는 염성오의 집에서 열린 회합에 참여하여 황윤실(黃允實) 등과 함께 만세운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3월 18일 읍내 장터에는 유봉진과 결사대의 계획에 동참하여 강화군 주민 10,000여 명이 집결하였는데, 이 때 대열에 참가하여 유봉진 등의 인솔에 따라 오후 2시부터 만세를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으며, 군청과 주재소를 포위하고, 장터에서 체포된 동지들의 석방과 친일 한국인 경찰들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다. 만세운동은 밤 11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첫 집결지였던 시장에서 만세를 외친 후 해산하였다.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도망쳤던 일제 경찰들은 인천의 경찰들과 서울 용산의 헌병대 병력을 지원받아 강화군 주민들을 검속하여 만세운동 참가자를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로 지목되어 붙잡힌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