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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홍

申才弘

1900. 12. 15 ~ 1960.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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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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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濟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제주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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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혁우동맹
  • · 제주청년동맹
  • · 제주 야체이카

포상 정보

  • · 애국장(2005)

관련 사건

  • · 제주 야체이카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5) 1900년 12월 15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구좌면(舊左面) 연평리(演平里)에서 태어났다. 1920~30년대 제주 지역 사회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12월 9일 제주기독청년회 주최의 “보수계급을 각성? 신흥청년을 촉진?”이라는 주제 토론회 연사로 참여하였다. 1926년 한문 서당 교사를 하였다. 당시 동료였던 김용상(金鏞相) 등과 함께 마을에서 신흥청년회(新興靑年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신흥주보(新興週報)』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신흥주보』를 연평리(演坪里) 10개 부락과 인근 영명사숙(永明私熟)에 배포한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1926년 9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에 대하여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검사에 의한 항소로 같은 해 11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벌금 20원을 받았다. 1927년 2월 신문기자로 재직하던 중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제주도의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청년조직을 정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조선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군 단위의 청년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로 인해 1928년 4월 10일 모슬포(毛瑟浦)에서 제주청년동맹(濟州靑年同盟)이 조직되었다. 1928년 8월에 일제가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에 나섰을 때, 제주도에서 김택수(金澤洙)·송종현(宋鍾炫)·강창보(姜昌輔) 등이 체포되는 상황에서도 검거되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으로 기존의 단체들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제주도의 청년들은 새로운 형태의 비밀 조직 건설을 모색하였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30년 3월 제주 구좌면 일대의 사회주의자 청년들이 혁우동맹(革友同盟)을 조직하였다. 혁우동맹은 당시 만들어진 비밀 결사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조직으로 오문규(吳文圭)·강관순(康寬順) 등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혁우동맹의 농민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혁우동맹은 처음에는 소년 운동에 비중을 두고 활동했지만 제주 정의면(旌義面) 성산포(城山浦)와 구좌면 일대의 해녀들의 투쟁이 급박해지자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1930년 11월 15일 공산주의자들이 제주도 해녀조합에 불만을 품고 이를 해산시키려고 협박 문구를 담은 불온 문서를 10여 리에 다니며 살포했고, 붙잡힌 자는 13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혁우동맹은 활동이 지지부진해지게 되었고, 결국 1931년에 해산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후 혁우동맹이라는 구좌면 지역 조직을 넘어 제주도 전체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제주도에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활동가들이 모여 제주도 사회주의자 간담회를 개최하여 역할 분담과 노선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강창보가 석방되자 더욱 활기를 띄었다. 1931년 (음)정월 초순경에 제주읍 부태환(夫泰煥) 집에서 제주 도내의 간부급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제주도 사회주의자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참여하여 조선청년동맹의 해소·신간회 해소·청년동맹·농민문제·여성문제·기타 운동 방법과 같은 사회주의 운동 방략에 대해 전반적인 검토를 하였다. 1931년 5월 16일에 제주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핵심 분자들은 조선공산당 제주 야체이카를 재결성하였다. 제주에서 야체이카가 재결성 된 것은 3년 만의 일로, 야체이카에서 제주 구좌면·정의면·서중면(西中面)·동중면(東中面)을 담당했다. 제주도 사회주의자들은 각지에서 새로운 농민회를 조직했으며 이로 인해 야체이카 산하에 각종 비밀 결사들이 조직되었다. 이 가운데 담당한 구좌면 지역이 가장 활발한 운동을 펼쳤다. 특히 1931년 7월 구좌면 연평리 고자화(高子華)의 집에서 강관순 등과 함께 모여 비밀 결사 '적(赤)'을 조직했는데, 적(赤)은 동리의 청년동맹·해녀회·농민회·리민회 등에 대해 사회주의 사회 건설과 항일 투쟁 방향을 지도하였다. 1931년 7월 모종의 이유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그해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 이 시기 제주 야체이카는 사회 각 방면의 청년·여성·노동자그룹 등의 운동단체를 지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산지항 축항 공사장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과 자주운항 운동, 해녀 투쟁 등을 지도하였다. 특히 야체이카의 투쟁은 1931년 11월부터 시작된 해녀들의 연속적인 투쟁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해녀 투쟁은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연인원 1만여 명이 참가했는데, 이 사건으로 총 78명이 잡혔다. 그리고 해녀 투쟁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제주 야체이카의 존재가 발각되어 다른 100여 명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년(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같은 해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이유있다고 인정받아 징역 5년(미결구류일수 180일 본형 산입, 법정구류일수 95일 산입)으로 감형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193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염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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