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규
申鉉圭1888 ~ 1928. 8. 1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광복회
- · 신민부
포상 정보
- · 독립장(200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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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2002)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문광면(文光面) 옥성리(玉成里)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88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으로 신양춘(申陽春)·현옥(申鉉玉)·신창균(申昌均)·신석현(申錫鉉)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전해진 자료의 한계로 자세한 생년월일과 집안 내력 등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가난한 농가의 3대 독자로 태어나 유년기 2년여 가량 한학을 공부했고, 20대까지 농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국내 비밀결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붙잡혀 옥고를 겪은 후 경북지역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 항일무장투쟁 단체 신민부(新民府)에 자금을 제공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3년 조직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1915년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1915년 8월 25일 대구(大邱) 달성공원(達城公園)에서 결성되었다. 총사령 박상진(朴尙鎭)을 주축으로 채기중(蔡基中)·우재룡(禹在龍)·김한종(金漢鍾) 등의 인사가 참여하여 국내외 지부를 두고 군자금 모집과 친일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7년 7월 김한종 등이 참여하면서 충청도 및 경상도지부 설치 등 외연이 확대되면서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등 적극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1917년 11월 10일 박상진과 김한종의 지시하에 광복회원 채기중·강순필(姜順必, 이명 강병수)·유창순(庾昌淳) 등이 경북 칠곡군(漆谷郡) 북삼면(北三面, 현 북삼읍)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였다. 이 무렵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도피하던 유창순이 12월 중순 방문하여 광복회의 목적과 그간의 활동상을 설명하자 그 취지에 찬성하여 충청도지부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평소 뜻을 같이했던 정운기(鄭雲淇, 괴산)를 가입시켰다. 충청도지부에는 충북출신으로 신옥현(申玉鉉, 괴산)·이희구(李喜求, 청주) 등도 참여하였다. 가입 직후 정운기와 함께 피신 중이던 채기중과 유창순·강순필을 도와 자택에서 수십 일간 숨겨주었다. 1918년 1월 초순 채기중의 명령을 받은 임봉주(林鳳柱, 이명 임세규)와 함께 경북 안동군(安東郡)의 안승국(安承國)에게 100원, 유승호(柳升鎬)에게 95원을 각각 모집하여 채기중에게 전달하는 등 경북 일대에서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1월 24일 광복회 충청도지부 김한종과 장두환(張斗煥)의 계획으로 김경태(金敬泰, 이명 김영근), 임봉주가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의해 광복회원 37명이 붙잡히게 되었다. 이때 붙잡혀서 청주지검에서 조사를 받았다. 1918년 8월 13일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예심을 거쳐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6년 만기로 풀려났다. 풀려난 후 거처를 경북 대구부(大邱府) 대구면(大邱面) 덕산정(德山町)(현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광복회원으로 활동하다 옥고를 치루고 1924년 출옥한 손양윤(孫亮尹, 이명 손백현)과 1926년 대구에서 만나, 의기투합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손양윤과는 광복회 활동 시기 이전부터 교류하던 관계였다. 그 방략의 일환으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 중국 만주 신민부(新民府)에 보내 독립군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양성을 지원하고자 하였다. 신민부는 1917년 광복회 만주 총사령으로 파견되었던 김좌진(金佐鎭)의 통솔 하에 항일전쟁을 대비,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우선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무기 마련을 위해 손양윤과 함께 1926년 6월 13일 밤 10시 30분경 경북 칠곡군 북삼면 오평리(吾坪里) 소재 일본인 부호 이쿠타 세이이치(幾田精一) 집에 잠입하여 엽총 2정과 군자금 105원 등을 확보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1926년 6월 16일 밤 경북 칠곡군 왜관면(倭館面) 매원리(梅院里, 현 칠곡군 왜관읍) 이이창(李以昌) 집에서 228원 23전을 모집하였다. 또 같은 해 8월 30일에 매원리 이수연(李秀延)에게 40원을, 같은 날 이이창에게 다시 230여 원을 모집하였다. 1927년 신민부에서 이병묵(李丙默)·윤창선(尹昌善)·윤홍선(尹弘善)·손호(孫滸)(이명 손허) 등이 국내 특파원으로 파견되자 같은 해 10월을 전후하여 윤창선의 소개로 이병묵·윤홍선·손호 등과 회합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또 경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손봉현(孫鳳鉉)·윤치백(尹致伯)·김홍규(金弘圭)·이상규(李相規) 등과도 합세하여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 윤홍선을 통해 김좌진과 연락하여 신민부에 제공하려는 뜻을 같이 하였다. 윤창선과 윤홍선은 사촌이고, 윤창선과 이병묵은 처남 매부로 이어진 혈연관계로 만주에서 선대의 영향으로 대종교(大倧敎) 활동 및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손봉현과 윤치백, 김홍규는 경상도지역에서 해원교(解怨敎)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다수의 동지를 확보하자 경북 일대 부호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1928년 1월 19일 저녁 10시 30분, 손양윤·이병묵·손호 등과 경북 칠곡군 왜관면 매원리 340번지 이상기(李相琦)의 집에 잠입하여 그에게 118원, 그의 아버지 이지연(李志淵)에게 30원 20전을 모집했다. 이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같은 해 3월 25일 저녁 11시 경북 칠곡군 약목면(若木面) 관호리(觀湖里) 69번지 장일환(張日煥)에게 370원 20전, 4월 15일 저녁 10시 경북 경산군(慶山郡, 현 경산시) 남산면(南山面) 경동리(慶洞里) 김두남(金斗南)에게 800원을 확보하였다. 한편 손봉현·윤창선·김홍규 등은 1927년 12월에서 다음 해 1월 사이 손봉현의 장인인 밀양(密陽)의 부호 김태진(金泰鎭)으로부터 2차례에 걸쳐 3,000여 원을 모금하였다. 이러한 활동 결과 1926년 6월부터 1928년 7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수천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 신민부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손봉현과 함께 활동하던 윤치백과 김병연(金秉淵, 손봉현의 처남)이 중국 만주로 향하던 중 밀정 서(徐)모의 밀고로 일제 경찰에 전모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28년 7월 30일 서울 태평통(太平通) 삼통여관(三通旅館, 현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에서 손양윤·손봉현·윤창선 등과 함께 붙잡혔다. 붙잡힌 후 이른바 강도죄·강도상인죄·‘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서 조사 받던 중 1928년 8월 10일 저녁 유치장에서 자결을 시도하였다. 같은 유치장에 수감 중인 사람 가운데 아편을 소지한 자가 있어 이를 음독한 것이다. 이틀 뒤인 8월 12일 오전 4시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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