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선
禹東鮮1864 ~ 1908. 4.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우동선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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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황해도 문화군(文化郡, 현 신천군) 초리면(草里面)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64년생으로 추정된다. 의병장 우용상(禹鏞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은 우창업(禹昌業), 우동선(禹東先)이다. 용모는 긴 얼굴에 우뚝한 코를 가졌으며, 기골이 장대하였다. 또 용맹이 뛰어나고 담력이 있었으며 전략, 전술에도 매우 능하였다. 1890년대 중반 이후 동학농민운동이 황해도 일대에서 전개되자 장연부(長淵府) 영장(令將)으로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하였다. 1895년 2월 23일 동학농민군 3,000명이 문화군 구월산에서 내려와 장연으로 공격해 올 때 이들을 막아낸 공으로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1903년 황해도 문화군 군수 구범서(具範書)가 사사로이 사용한 예목전(禮木錢) 2천 냥 등 5천 냥에 대해 도리어 구범서로부터 우한상(禹漢相)과 함께 이를 탈취했다는 누명을 쓰고 붙잡혔다. 하지만 같은 군에 거주하는 김익현(金益鉉)·유무혁(柳武赫)·조명여(趙明汝) 등이 무죄를 탄원하고 삼자 대질을 통해 무고함이 밝혀져 풀려났다. 1905년 장연부 정토교(淨土敎)의 회장을 역임하였는데, 삼촌인 우태정(禹泰貞)은 해주(海州)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의병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 이미 문화·장연 일대에서 신망 있는 인물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알리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황해 구월산(九月山)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의병부대의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으로 추대되었다. 구월산 월정사(月精寺)에 근거지를 두고 황해도 지역 일대에서 일제 군경을 처단하거나 침략 시설물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산간 지세를 이용하는 유격전으로 전개하여 일본군에 타격을 입히며 끈질긴 항쟁을 지속하였다.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면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의병 부대에 해산 군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한층 강화된 전력으로 그 기세를 떨쳐나갔다. 부하로는 1908년 4월 황해 장연(長淵)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일제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전사한 중장(中將) 김보경(金保景), 1908년 5월 장연(長淵) 신남면(薪南面)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한 장호길(張浩吉)과 장호선(張浩善), 1919년 남만주로 넘어가 대한독립단에 가입한 우승창(禹承昌), 사격의 명수로 크게 이름을 떨친 소대장 조윤봉(趙允奉)·경리 이진태(李振台)·김두행(金斗行)·강만석(康萬石)·장동찬(張東燦)·고익균(高益均) 등이 있다. 해산 군인의 의병 참여로 기세가 높아지자 일제에 대항하는 통합된 의병으로 13도창의군을 결성하였고,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하였다.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였지만 일본군의 반격과 의병 부대 간 소통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으면서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서울 진공 작전 실패 후 의병의 기세는 한풀 꺾이게 되었다. 1908년 1월 중순경 황해도 일대에서 일본군에 패한 의병을 다시 모아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3월 하순에 장연부 동면 율동에서 일진회원을 처단하였으며,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연 신북 백촌에 들어와 1박을 한 후 이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의병의 기세가 다시 높아지자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선유위원(宣諭委員)을 각지로 파견하였는데, 황해도에도 서상륜(徐相崙)이 선유위원으로 파견되었다. 서상륜은 황제의 칙서를 보내 해산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1908년 3월 9일 서상륜에게 보낸 공함(公函)에서 “황은(皇恩)이 망극하나 이완용(李完用) 등이 소위 5조신약(五條新約)과 7조협약(七條協約)을 자의 체결하야 500여 년의 강토와 삼천리 인민을 일본의 노예로 만들고……역적 이완용(李完用)과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서명하였으므로 선유사도 매국당(賣國黨)의 응견(鷹犬)이다.”라고 하면서 계속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병(麻病)에 걸려 1908년 4월 장연 서남방 약 6리 지점에 있는 송천 의사 서주부(徐主簿)의 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한곳에 머물며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이에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주변의 김용인(金龍仁)의 집과 강영준(姜永俊)의 집을 오가면서 치료를 받았다. 송천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장연군 주사 손정훈(孫鼎薰)의 밀고로 4월 15일 장순영(張順永)이 일본군에게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부하 40여 명이 지휘를 받고자 송천으로 이동해 왔다. 일본군도 소관(小官) 이하 7명의 일본군을 4월 16일 오전 9시경 포로 장순영을 향도(嚮導)로 하여 송천으로 파견하였다. 일본군은 오후 2시경에 송천에 도착한 다카모리(高森) 오장(伍長)에게 병사 1명을 이끌고 강영준의 집을, 스가와라(菅原) 일등병에게 병사 1명을 붙여 김용인의 집을 수색할 것을 명하고 소관(小官)은 부하 2명을 인솔하고 서주부(徐主簿)의 집을 현지인의 안내로 급습하였다. 이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강영준의 집에서 다카모리 오장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소관(小官) 이하 각 병사들은 즉시 강영준의 집으로 이동하여 심문하였다. 처음 심문에서는 자신을 우창업(禹昌業)이라고 진술하였고, 현지의 유사(有司) 역시 우동선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있던 장순영이 우동선이 확실하다고 진술함으로써 신원이 노출되었다. 1908년 4월 17일 새벽 1시 30분경 장연에 도착한 후 감옥에 감금되었으며, 감금된 다음 날인 4월 18일 오전 1시경 탈옥을 시도하면서 감시병의 총을 빼앗아 일본군과 교전하여 8명을 처단하였으나 총격을 입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심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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