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相根
相根1911 ~ 1945. 8.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인애국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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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강원도 통천군(通川郡) 순령면(順嶺面) 오류리(五柳里)에서 유춘기(柳春基)와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르면 1933년 당시 22세인 것으로 보아 1911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주천현(朱天懸)이다. 1919년 통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23년 가족과 함께 북간도로 이주하면서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얼다오거우(二道溝)로 들어갔다. 이후 봉밀구(蜂密溝) 갑산촌(甲山村)으로 옮겨 약 1년 반 동안 거주하며 농사를 지었다. 1925년 룽징(龍井)으로 가서 동흥중학교에 들어가 1년간 수학하다가 가정 형편으로 중도 포기하였다. 그리고 야학을 설치하여 이주 동포들을 대상으로 계몽 사업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허룽현(和龍縣)으로 이사하였고, 1928년에는 하얼빈(哈爾濱)에 있는 이모부 이종익(李鍾翊)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1930년 여름 이모부에게서 약간의 노자를 얻어 하얼빈을 떠나 다롄(大連)을 경유하여 상하이(上海)로 갔다. 1930년 상하이에서 공동조계 오마로(五馬路)에 있는 영주(瀛州)여관에 투숙한 후 프랑스조계 노신부로(勞新父路)에 있는 인성소학교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신기섭(申基燮)의 소개로 프랑스조계 보경리(普慶里) 4호에 있는 교민단을 방문하고 단장인 김구(金九)를 만났다. 김구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취직을 부탁하였는데, 김구는 당장은 어려우니 당분간 민단에 거주하라고 하였다. 민단 건물 3층에 2주간 한국독립당 당원 백계준(白溪俊) 등 2명과 함께 머물렀다. 그 후 김구의 소개로 영국인이 운영하는 전차회사에 취직하였다. 1932년 2월 초 교민단의 의경단(義警隊)에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상하이 거류 한국인의 질서를 유지하고 반역자를 교정하는 일종의 경찰기구였다. 대장은 김구였다. 그러나 2월 27일 의경대를 탈퇴하였다. 일본이나 홍콩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1932년 2월 24일 김구의 권유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애국단 입단의식으로 프랑스조계 패륵로(貝勒路) 신천상리(新天祥里) 20호 2층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때 최흥식(崔興植)도 함께하였다. 사진은 모두 3장을 촬영하였다. 1장은 김구와 함께, 한 장은 독사진, 나머지 한 장은 왼손에는 폭탄을, 오른손에는 권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아울러 일본군 수뇌부에게 폭탄을 투척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가슴에 달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세워 만주를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중국정부는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국제연맹에서는 리턴(Lytton) 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리턴 조사단은 그 해 5월 26일 다롄에 도착하여 조사 활동을 한 뒤, 5월 30일 다롄을 출발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인애국단은 리턴 조사단을 마중 나올 관동군 사령관, 관동청(關東廳) 장관, 만철(滿鐵) 총재 등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 김구는 단원 중 제일 민첩한 최흥식을 4월 1일 먼저 다롄으로 잠입시켰다. 최흥식은 북산대통(北大山通) 5호에 있는 한국인 어부조합숙소 김정순(金正順) 방을 거점으로 비밀리 뤼순(旅順)·따렌의 경비상황과 펑톈(奉天)·창춘(長春)·하얼빈 등지에 잠행하여 각지 경비를 상세히 조사하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4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보경리 4호 문 앞에서 김구로부터 수통형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2개를 받았다. 2개의 폭탄 중 도시락 형태의 폭탄은 김구에게 돌려주고 수통형 형태의 폭탄 1개만 챙겼다. 4월 27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5월 4일 다롄에 도착하여 이성원(李盛元)·이성발(李盛發) 형제의 도움을 받아 폭탄과 권총 등을 반입하였다. 고다마쵸(兒玉町)의 만철 기숙사 고다마료(兒玉寮)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사원 방에 거주하면서 현지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어 하얼빈으로 가서 1~2일 뒤 도착한 국제연맹 조사단 일행에 대한 경비 상황, 누가 영접하는지 등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거사 결행장소를 다롄으로 결정하였다. 다롄은 사실상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침략성 폭로와 국제 문제 야기에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계획한 의거 방법은 다롄에 도착한 국제연맹조사단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가 아니었다. 두 가지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국제연맹조사단을 맞이하기 위하여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다롄역으로 마중 나올 것이 분명하므로 이들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다롄역 플랫 홈에 내릴 때나 혹은 자동차로 도착하여 차에서 내릴 때 폭탄을 던져 처단하는 방안이었고, 또 하나는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국제연맹 조사단을 방문하는 장소에서 의거를 결행하는 방안이었다. 이를 위해서 현지에서 발행되는 신문 등을 통해 국제연맹조사단과 일본의 주요 인물들과의 회견 시간과 장소 등을 파악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같은 해 5월 26일 오후 7시 40분 국제연맹조사단이 펑톈에서 다롄역에 도착하면 환영 나온 일본 고관들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국제연맹조사단 일행이 다롄을 떠나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는 5월 30일 오전 9시 30분 거사를 결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또한 거사 다음에는 미리 준비한 권총으로 자결하여 일제 군경에게 체포되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1932년 5월 1일 사전 준비 차 다롄에 온 최흥식의 전보가 단서가 되어 일제의 검거망에 걸려들어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최흥식은 5월 1일 다롄전신국에서 “부족 70원 발송하라”는 전보를 발송하였다. 주소지는 안공근의 거처인 프랑스 조계 패륵로 신천상리 20호였고, 수취인은 곽윤(郭潤)이었다. 곽윤은 김구가 편지 등을 통해 주요 정보를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안공근의 거주지는 독립운동가들의 통신용으로 이용하였다. 김구와 안공근 등이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 일시 몸을 피신한 관계로 이 전보를 수취하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났고, 5월 19일 상하이 일본전신국 게시판에 ‘배달불능 전보’로 분류되었다. 이 전보의 수취인이 김구라는 사실을 파악한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5월 19일자로 관동청에 발신인의 체포를 요청하였다. 그 결과 최흥식은 의거를 결행하기 2일 전인 5월 24일 새벽에 체포되었고, 같은 날 코다마료에서 붙잡혔다. 1933년 10월 2일 뤼순 관동주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예비, 총포화약류취체규칙 위반 등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최흥식은 징역 10년을 받았다. 뤼순감옥에서 13년간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8월 14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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