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균
安秉均1892. 9. 22 ~ 1941. 3.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05인 사건
- · 선천경찰서 폭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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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92년 9월 22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선천면(宣川面) 남동(南洞)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105인사건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은 안준(安濬)이다. 선천읍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신성학교(信聖學校)를 졸업하였다. 신성학교는 1906년 9월 선천군의 한국 기독교인들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의 협의회가 협력해 설립한 학교였다.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은 휘트모어(Norman C. Whittemore; 위대모(魏大模))이고, 1909년에는 2대 교장인 매큔(George Shannon McCune; 윤산온(尹山溫))이 취임해 오래 동안 재직하였다. 1911년 신성학교 재학 중 동료 학생들과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부친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고, 반일적 성격이 강한 신성학교가 일제의 표적이 되면서 연루자에 포함되었다. 학교 졸업 후에는 모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기독교 사업에 뛰어들었다. 1920년 무렵에는 선천 기독교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7월 1일 회장의 자격으로 신성학교에서 강연회를 개최해 ‘오늘날 조선청년이 시급히 해야 될 일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강연회가 있고 난 한 달 후, 미국의원단 일행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들의 한국 방문에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강압 통치에 신음하는 한국인들의 실정을 알릴 좋은 기회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이 실행하고 있는 독립운동 방략에 입각하여 의원단에 접촉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이목을 끌어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알리고자 준비하였다. 서간도(西間島) 콴뎬현(寬甸縣)에 본부를 둔 독립군단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4개조의 행동대를 편성해 국내로 진입시켰다. 김영철(金榮哲)·김성택(金聖澤) 등의 제1조는 서울로, 장덕진(張德鎭)·박태열(朴泰烈)·문일민(文一民) 등의 제2조는 평양으로,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 등의 제3조는 선천으로, 정인복(鄭仁福) 등 2명의 대원은 신의주 방면으로 특파되었다. 이 중 선천으로 들어온 제3조는 현지에서 그들을 지원해 줄 동지를 구하다 신성학교 5학년생인 21세의 박치의(朴治毅)를 만났다. 박치의 또한 이들과 만나기 이전부터 이번 기회에 어떤 큰일을 일으켜 미의원단에게 한국의 사정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총영의 특파대와 박치의는 동지가 되었고, 그의 형 박치조(朴治祚)까지 함께 가담하였다. 이같이 한 조가 되어 거사를 준비하면서 박치의로부터 선천지역의 지도급 인사인 김석창(金錫昌)·백경옥(白敬玉)·백시찬(白時瓚) 등과 함께 계획을 들었다. 이들 인사들은 박치의의 거사 계획을 듣고, 자신들도 일이 일어나는 순간 미의원단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전달하고자 논의하고 이를 준비하였다. 박치의와 광복군총영 특파대는 의원단이 선천을 경유하는 순간 선천역을 비롯한 큰 관공서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순간을 놓쳐 처음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준비한 계획은 실행하지 못했지만, 나라 안에서 큰 사건이 일어나면 미의원단이 주목할 것으로 생각해 8월 31일 밤 선천경찰서와 선천군청에 폭탄을 던졌다. 두 곳에 던진 폭탄 중 경찰서의 것은 크게 폭발했으나, 군청의 것은 불발되고 말았다. 이 거사로 17명이 붙잡혔으며, 주도자인 박치의는 사형을 받았고, 김석창· 백시찬 등과 진정서를 준비하고 거사를 지원한 이유로 붙잡혀 1921년 7월 2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았다.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5년 8월 14일 김석창·백경옥과 함께 가출옥되었다. 출옥 후에는 다시 선천기독교청년회 회장직을 이어가며 활동하였다. 1930년대 초반에는 조선일보 선천지국 기자로 활동하며, 1933년 8월 22일 선천기자단(宣川記者團)을 조직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기자단에 참여한 신문사는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국경(國境)일보·부산일보·조선신문·경일매신(京日每申)·매일신보 등으로 위원장은 이영학(李英學)이었다. 1934년에는 사립학교이기에 운영이 어려운 모교 신성학교에 50원을 기부하였다. 일제는 1931년 ‘9·18사변’을 일으켜 위성국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전선을 확대시켰다. 확대된 전선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 목적 달성을 위해 한국인 지도자들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1938년 6월 4일 조선기독청년회장 윤치호(尹致昊)에 의해 동 청년회 이사회가 개최되었다. 이사회의 주 안건은 조선기독청년회를 세계기독청년연맹 소속에서 일본기독청년연맹 산하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일제에 의해 한국 청년에 대한 지원병제도(志願兵制度)가 실시되고, 제3차 교육령개정등이 발표되는 등 비상시국사태를 맞아 기독교계도 내선일체(內鮮一體)·황국신민(皇國臣民)의 정신으로 충성을 다하고자 함이 이유였다. 이사회에서 결의된 사항은 각 지방 기독청년회에 전보로 고지하고, 지방위원들을 소집해 이를 토의하기로 결정하였다. 선천기독청년회장으로 선천위원이었기에 고지를 받았다. 1938년 8월 19일 지방 위원들이 소집되어 회의가 개최되어 이에 참석하였다. 경기도경찰부의 경부(警部) 이노우에 카주토(井上數人)가 인솔한 일제 경찰들의 감시 하에 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장 윤치호의 이사회 결의 사항인 세계기독청년연맹 탈퇴와 일본연맹 가입에 대한 일방적 선언이 있고, 이를 형식적인 투표를 거쳐 통과시켰다. 참석자들에게는 이견을 발표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선천으로 돌아온 이후 주로 모교인 신성학교 일에 관여해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9년 8월경에는 운영이 어려운 신성학교를 재단법인(財團法人)으로 만드는 데 참여하여, 같은 달 25일 동창회를 대표해 이사(理事)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신성학교 이사가 된지 약 1년 반 후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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