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무
安炳武1912. 6. 8 ~ 1986. 5. 3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국국민당청년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나고야(名古屋) 광동군관학교 사건(廣東軍官學校事件)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912년 6월 8일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린장현(臨江縣) 홍토애(紅土崖)에서 부친 안호식(安顥植)과 모친 이도식(李道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 안주읍(安州邑) 신의리(信義里)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호는 해암(海菴)이다. 1915년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1919년 기독교 계통의 유신학교(維新學校)에 입학하여, 1922년 천도교 계통의 보광학교(普光學校)로 옮겼다. 1927년 안주농업학교에 진학하였고, 천도교 안주학생회의 반일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1930년 3월 안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사학을 배울 목적으로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안창호에게 보내는 큰아버지의 서신을 휴대하고, 서울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주요한(朱耀翰)으로부터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조원창(趙元昌)을 소개받았다. 상하이에서 조원창을 만나 안창호에게 밀서를 전달하였고, 세 사람은 김붕준(金朋濬)이 경영하는 사진관 미예공사(美藝公司)에서 기숙하며, 양명진(楊明鎭)으로부터 영어 개인수업을 받으며 진학 준비를 하였다. 푸단대학(復旦大學) 예과에 청강생으로 다니며 동계방학 군사특별훈련단에 참가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32년 1월 ‘상하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자 중국 푸단대학 학생의용군을 거쳐, 중국군 19로군에 편입되어 위문활동을 벌인 다음, 장쑤성(江蘇省) 일대를 무대로 강연·포스터 살포 등의 후방선무 공작을 전개하였다. 3월 말 정전협정 체결 뒤에는 19로군 의용군에서 3개월 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1931년 9월 18일 이후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상품 배격운동이 번지고, 대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중국이 이겨야 우리나라의 독립의 길이 열릴 것이고, 또 중국과 조선이 힘을 합쳐서 싸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위대열에 참가하였다. 이후 가깝게 지내던 구익균(具益均)이 중산대학(中山大學) 조교로 근무하며 한국독립당 활동에 참여하고 있고, 상하이 도착 직후 거처를 제공했던 김붕준이 한국독립당 광둥지부장에 임명되자, 광저우(廣州)로 내려가 한국독립당의 추천으로 중산대학 법학원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일본과 국내의 천도교 청년학생들을 중국 광동성의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간부로 양성하려 했던 이른바 ‘나고야(名古屋) 광동군관학교 사건(廣東軍官學校事件)’(1934년 6월)의 중국지역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중산대학 법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0월 중순 광저우를 떠나 한커우(漢口)를 거쳐 난징(南京)에 도착하여 12월 말 한국국민당, 임시정부 인사들과 창사(長沙)로 이동하였다. 이때 한국국민당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38년 1월부터 1940년 8월 사이, 창사(長沙)에서 신보(晨報)·역보(力報)·항전일보(抗戰日報)·건군(建軍) 등의 신문·잡지에 일본군의 침략을 비판하고 일제의 한국 식민지배 상황을 폭로하는 글을 발표하여, 중국인들을 상대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야욕을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창사방송국에서 일본군내 한적사병(韓籍士兵)을 대상으로 ‘반전(反戰) 궐기’를 촉구하는 방송에도 참여하였다. 1939년 3월 중국군 제5군 정치부가 있는 광시성(廣西省) 취앤현(全縣)으로 가서, 중국군사위원회 궤이린행영 정치부(桂林行營政治部) 소속 제5군 소교(小校) 겸 ‘일본어 비서’에 임명되어, 일본군을 상대로 한 대적 선전공작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또 중대 정치지도원들과 하사관교육대에서 초급 일본어와 대적선전 표어쓰기, 선전구호 부르기 등을 가르쳤다. 11월 10일 자로 정치부 소속 정치공작단원에 임명되어, 정치부 제3조에서 대적 선전공작에 참여하였다. 이 사이 행영정치부에서 간행하는 『건군(建軍)』에 일본의 실정을 고발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해 겨울에는 난닝(南寧)에서 가까운 천강전선(遷江戰線)에 파견되어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벌였다. 1940년 4월 1일자로 제3조 소교로 발령받고, 일본 측 신문·전보·통신 등을 도청 번역하여 적정(敵情) 판단 자료로 제공하였다. 이어서 궤이린시 근교에 있는 중국육군군관학교 제6분교의 일본어 교관에 임명되었고, 1940년 9월 궤이린의 청년서점에서 『일본제국주의 발굽 하의 조선(日本帝國主義鐵蹄下的朝鮮)』이라는 중국어 저작을 출판하였다. 1941년 8월 중국군관학교 교관직을 사임하고,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에 있는 광복군 징모분처(徵募分處)에 합류하였다. 징모분처에는 한국독립당 제8구당부(區黨部)도 겸하였고, 김문호·신정숙·이지일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일주일에 두 차례 상라오 라디오방송에 출연하여 한국어와 일본어로 대적 선전활동을 벌였다. 또 중국 제3전구 정치부에서 운영하는 유격간부훈련반에서 일본어와 적정연구 과목의 강의도 하였다. 미국과 일본 간의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1941년 12월 징모분처를 떠나 1943년 10월까지 전선일보사(前線日報社)에서 근무하였다. 1942년 여름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푸젠성(福建省) 북부지역의 젠양(建陽)으로 피신하여, 전선일보 자료실 주임에 임명되어, 신문을 복간하였다. 1943년 중국군 제3전구 사령부를 따라 상라오로 돌아와, 그해 10월 구이저우(貴州)를 거쳐 충칭(重慶)으로 갔다. 1943년 말 충칭(重慶)에 도착한 후 1944년 3월부터 1945년 12월까지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임시의정원 비서·편찬위원회 비서·중한문화협회 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겨울에는 안우생·엄도해 등과 충칭 주재 미국대사관에 파견되어, 일본과 한국 내에서 발간되는 신문·잡지와 뉴스·방송·전보 등을 번역 분석하는 공작에 참여하였다. 1946년 5월 초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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